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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신학/목회

추모예배 안내서

by 꿈꾸는 나무의자 2018. 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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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추절 추모(追慕)예배 안내

 

 

차 례

 

 

중추절 추모감사예배

1. 중추절 추모 예배 지침

2. 추모(追慕)예배의 의의

3. 추모예배 준비

4. 성경의 추수감사절(초막절)

5. 추수감사절의 기원

6. 한국의 추수감사절

 

Focus on 2

기독교와 조상제사

1. 조상숭배 제사에서 기독교가 수용할 수 없는 요소들

2. 조상숭배 행위에서 기독교가 이어 취할 수 있는 문화적 요소들

3. 추모예식 제안

 

 

 

 

 

 

 

 

 

 

 

 

 

 

 

 

 

 

 

 

 

중추절 혹은 기일에 드리는 추모감사예배

 

 

 

1. 중추절 추모 예배 지침

(1) 때를 따라 햇빛과 단비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린다.

(2) 수고한 농부들에게도 감사한 마음을 갖는다.

(3) 음식을 장만하여 친척과 이웃과 함께 사랑의 교제를 나눈다.

(4) 웃어른을 찾아 인사드리고 성묘도 한다.

(5)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들이 내놓을 열매는 어떠한 것인지 생각해 보는 기회로 삼는다.


2. 기일에 드리는 추모(追慕)예배의 의의
추모(追慕)라는 용어가 바람직합니다.

추도(追悼)라는 용어는 죽은 이를 생각하며 슬퍼해 한다는 뜻입니다. 이 말속에는 다분히 불신 자적인 인상이 짙습니다. 추모(追慕)라는 용어의 뜻은 죽은 사람을 기억하고 그리워함입니다. 이렇게 보면 기독교에서 사용되어야 하는 바른 용어는 추모(追慕)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1) 불신자에게는 올바른 죽음의식을 주는데 있습니다.

죽음은 죄값이며 하나님을 향한 반역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죽음을 잠잔다는 말로 성경은 표현합니다. 이것은 죽음은 끝이 아니라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영혼이 깨어난다고 하는 것을 전제한 것입니다. 영혼은 사람들의 생각처럼 다시 돌아오거나 혹은 정처 없이 세상을 방황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죽음 이후에는 심판과 부활이 있습니다.

(2) 믿는 가족들에게는 부활신앙이 다시 한번 확인되는 시간입니다.

먼저 신앙 안에서 위로를 받고 부활신앙이 확인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신자들이 부활신앙이 없는 불신자들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3) 조상과 부모님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시간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조상의 경건한 행위는 자손을 지키고 구원을 얻게 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추모예배는 조상과 부모님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드려져야 합니다.

(4) 신앙상속을 인식하는 특별한 기회입니다.

추모예배는 신앙상속에 대한 감사가 수반되어야 합니다. 부모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부모님을 통해서 믿음을 상속받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게 됨을 다시 한번 하나님께 감사드리면서 고인을 기릴 수 있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5) 그리스도의 구속적 사랑을 나누는 친교의 시간입니다.

가장 슬플 때에 사람들과 그 슬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는 친교는 그리스도인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친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추모예배 준비

추모일이 다가오면 이에 따른 준비에 착수합니다.

(1) 추모예배 날짜는 추모일이 마땅하나 주일은 피하셔야 합니다. 주일인 경우는 토요일이나 월요일로 옮겨서 함이 좋습니다.

(2) 예배시간은 정오의 시간이나 저녁시간 시간을 전후로 하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예배후에 음식을 나누는 친교의 시간이 수반되기 때문입니다. 전통제사나 의례와 같이 밤늦은 시간을 고집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3) 기독교적인 추모예배의 특징은 직계자손과 친척이라는 가족공동체를 초월하고 있습니다. 고인과 함께 평소 가까운 신앙생활을 하던 분들을 약간명 초대하여 고인을 추모하여 예배드리는 것이 좋습니다.

(4) 추모예배 장소에 촛불을 켜놓거나 향을 피우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고인의 사진과 화분 정도의 장식으로 경건분위기를 조성하면 될 것입니다.

(5) 고인의 유품을 준비하면 좋습니다. 고인의 사진과 육성테이프, 고인의 약력, 사진첩, 그리고 사용하던 성경과 찬송가책등은 생존시 모습을 그대로 그릴 수 있는 아주 효과적 유품들이라 하겠습니다.

(6) 예배의 집례는 소천하신 후 1년까지는 교역자가 집행하는 것이 좋겠으나, 그 이후에는 가족중심으로 모이는 것이 합리적 입니다.

(7) 만일 불신가족으로 불신자의 심한 반대에 부딪쳐서 추모예배가 어려울 경우에 그 의도가 순수하다면 당분간은 유연한 태도로서 양해시켜 나가는 것이 좋습니다. 이것이 오히려 먼 장래를 내다볼 때 유익이 됩니다.

(8) 불신자의 가족이나 친구중에서 교회전통에 어긋나는 일을 하려고 하면 예식이 끝나는 뒤로 미뤄야 합니다.

(9) 모든 예배자들은 복장을 단정히 하고 경건한 마음을 갖도록 합니다.

(10) 모든 준비가 끝나면 집례자는 고인의 사진 오른편에 자리잡고 그 밖의 사람은 적당히 자리 잡게 하고 시작하여야 합니다.

(11) 예식이 끝나고 애찬의 식탁에 둘러앉아 친교의 시간을 갖도록 합니다.

 

 

4. 성경의 추수감사절(초막절)

곡물을 거두어들이는 것

게셀의 달력은 고대 이스라엘의 추수기들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해 주고 있다. 감람열매는 연초(9월 중순부터 11월 중순까지)에 수확되었는데, 사람들은 긴 나무막대로 감람나무 가지를 쳐서 그 열매를 거두어 들였다(24:20, 17:6). 또한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3, 4월에 아마를 베어 말림으로써 아마를 거두어 들였다(2:6). 한편 보리는 4월이나 5월 초에 수확하였던 반면에 밀은 5-6월에 수확하였다. 그리고 8-9월에는 여름 과일들(무화과, 포도, 석류)을 수확하였다.

이스라엘이 큰 기쁨을 갖고 지키던 세 절기 가운데 하나로, 농사력이 끝나는 가을에 지켰으며, 40년간의 광야에서의 유랑을 상기하면서 계약을 갱신하는 절기는 초막절이다. 보통 장막절로 알려져 있다(참조 대하 8:13). 초막절의 다른 이름으로 성서에서 나오는 것들로는 수장절(23:16), 여호와의 절기(23:39, 21:19), 절기(왕상 8:2, 65, 대하 7:8, 8:14, 30:29, 45:23,25) 등이 있다.

비록 신 16:16은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는 일년에 세 번 스스로를 여호와께 보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초막절이 본래의 순례절기였던 것 같다. 사무엘의 아버지 엘가나는 매년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실로로 여행을 하였다(삼상 1:3, 21). 그가 순례를 한 때는 아마도 매년실로에서 벌어졌다. 여호와의 절기때였을 것이다(21:19). 이 여호와의 절기는 포도원 무도회가 특색이었는데(21:16 이하), 이러한 사실은 본 절기가 가나안 인들의 농경의례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절기는, 초막절의 초기 형태를 이해하기에 가장 좋은 이스라엘의 절기였다. 초막은 후에 이스라엘이 그 유랑생활을 기억하기 위해 사용하였으나, 본래는 농경생활에서 유래한 것이다. 즉 올리브 과수원 주인들은 수확의 달(9)이 되면, 밤마다 가지와 덩굴로 만든 오두막에 서서 올리브 밭을 감시했다.

초막절은 바벨론 포로기 이후의 유대교에서 지극히 인기 있는 절기가 되었다. 본 절기는 특히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순례하는 기회로 이용되었다. 순례자들은 바빌로니아나 그 밖의 먼 지역에서, 성전과 예루살렘 성을 위해 모은 봉헌물들을 가지고 왔다. 한편 노상강도들이 순례자들을 약탈하였기 때문에 그들을 보호하는 문제가 때때로 언급되기도 한다. 초막절은 일곱 번째 달(티쉬리)의 열 다섯 번째 날에 시작되었다. 이달의 첫 번째 날은 특별히 거룩한 날(23:23-25)이었으며 열번째 날은 속죄 일이었다. 이 세 가지 행사들은 본래 하나의 의식이었던 것이 세분화된 듯하다. 일곱 번째 달의 첫째 날이 거룩한 날이었다는 점은 아마도 예전에 이스라엘의 1년이 가을에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징표일 것이다. 그러나 본래 초막절은 1년의 마지막에 지켜졌다(23:16, 34:22).

초막절에 참석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몇 가지 의무가 주어졌다. 즉 그들은 7일 동안 먹고 자고 해야할 초막을 스스로 준비해야만 하였다. 더욱이 모든 순례자는 예루살렘의 주위에서 도금양, 버드나무, 종려나무 등의 잔가지들을 모아야만 하였다. 본래 가지들은 천막을 세우기 위해 사용하였다(8:13-18). 후에 그 가지들 중의 일부는 함께 묶어, 룰라브(lulab)라고 불리는 일종의 축제 장식물로도 사용하였다.

헌수 의식은 절기 동안에 매일 아침마다 가장 먼저 드리는 공통의식이었다. 초막절의 첫날 아침, 제사장의 행렬은 실로암 못에 가서 일주일 동안 사용하기에 충분할 물을 그릇에 채웠다.

 

두번째로 중요한 공통의식은 밤에 거행되었다. 이 의식은 축제의 즐거움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제사장들의 낡은 의복으로 만든 심지가 끼워진 4개의 커다란 일곱 가지의 촛대가 성전의 전지역을 밝게 비추었다.

그 촛불 밑에서, 의식에 참석한 자들은 피리에 맞추어서 횃불 춤을 추었고, 레위인들은 성전으로 올라가는 노래(120-134)을 불렀는데 이스라엘의 뜰에서 여인의 뜰로 걸어 내려가면서 열 다섯 계단의 한 계단에서 마다 노래 하나씩을 불렀다. 30:29에서 언급된 밤의 거룩한 절기는 바로 이 의식일 것이다. 이 의식은 7일 동안 매일 밤마다 거의 밤새도록 계속되었다.

매일 새벽에는 제사장들이 장엄한 의식을 거행하였다. 닭이 울 때 그들은 성전의 동쪽 문으로 가서, 해가 뜨는 순간 서쪽을 향해 서서 성전을 마주 보면서 다음과 같이 암송했다. "우리의 조상들은 이곳에 있을 때 얼굴을 동쪽으로 돌려 동쪽 태양에 경배하였으나 우리의 눈은 주께로 향했다. "(8:16)

이러한 세 가지 공통 의식을 7일간의 축제기간 동안에 매일 행했다. 할렐 시편은 여덟째 날에 개최되었던 장엄한 의식에서도 불려졌다. 아홉째 날은 심하트 토라라고 불리는데 절기의 초첨이 자연에서 율법으로 옮겨짐을 나타내는 징표였다. 율법 낭독기간이 이때 시작되었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며, 아마도 초막절과 신년축제와의 관계와도 연관되어 있는 듯하다.

초막절은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밭에서부터 거두어 드릴 때", 즉 추수기와 연관지어 있다. 출애굽기에는 초막에 대한 언급이 나오지 않으며, 초막의 기념적 역할도 명시되어 있지 않고 초막절의 기간이나 규례도 밝혀져 있지 않다. 순례시의 요건을 언급한 구절로 간주되는 출 23:1714-16절에 나중에 첨가된 것이라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견해이다. 삼상 1:21을 고려해 볼 때 계약법전에서 수장절은 초기 이스라엘의 유일한 순례절기이다. 엘가나가 제사를 드렸던 실로에서의 의식은 삿 21:19 이하에 언급되어 있는 실로에서의 여호와의 절기와 동일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수장절은 어느 정도 자유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 환회의 의식이었던 것 같다. 수장절은 제사를 드리기에 가장 알맞은 시였고(29장에서 초막절에 드린 제물의 양은 어떤 다른 절기보다도 많다), 이러한 사실은 이 절기에는 마음껏 먹고 마실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참조. 삼상 1:3-9).

또한 한나가 술에 취했을 것이라고 엘리가 짐작을 하는 것(삼상1:14)은 이 축제의 성격을 나타내 준다고 할 수 있으며, 명백히 유혹을 목적으로 한 포도원에서의 처녀들의 춤은 포도수확기에 먹고 마시고 놀던 가나안 사람들의 전통적 경향을 강하게 암시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축제는 여호와의 절기였으며 출 23:16에서의 규정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문화에 동화되어 가던 과정의 초기단계에서 생겨난 것이다.

16:13-15에서 수장절은(하나님께서 택하신 곳에서 거행되어야 함) 초막절로 되어 있다. 하지만 초막의 의미나 기능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다. 초막절은 7일 동안 계속되었고, 타작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에 대해 감사를 드렸다. 이 신명기에서는 너의 절기를 즐기는 데 있어서의 특별한 훈계(14)"하나님이 농사를 축복하사 온전히 즐거워하게 되리라 "는 말과 함께 나온다.

 


5. 추수감사절의 기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가 너희의 소산을 먹을 때 너희에게 그것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라. " 고 명하였으며, 그 후로(혹은 그 전에도) 인간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땅의 소산을 허락해 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를 드려왔다.

추수감사절을 따로 정한 것은 미국 이주자들에 의하여 처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즉 이 관습은 이미 오래 전부터 유럽에서 행해졌던 것이다. 매사추세츠의 청교도들은 크리스마스 절기를 가톨릭의 절기로 간주하여 이를 지키지 않았다. 이처럼 크리스마스를 로드섬을 제외한 영국의 식민지에서 절기로 지키지 않게 되자 추수감사절을 크리스마스 절기 대신에 정통과 청교도들의 절기로 지키게 되었다.

미국에서의 최초의 추수감사절은 미국에서의 첫 번째 수확기였던 1621년 가을에 플리머드 정착지에서 미국이 주자들에 의하여 지켜졌다. 미국 이주자들과 그들의 인디언 손님들은 야외에서 여러 가지 음식을 차려놓고 일주일간 이 추수감사절을 지켰다.

17세기 말 이전에 이 추수감사절은 코네티컷주와 매사추세츠주의 연례적인 성일이 되었으며, 이 관습은 서서히 다른 지역들로 퍼져 나가기 시작하였다. 처음에 이 추수감사절은 특별한 종교적 절기(비록 나중에는 종교적 색채를 지니게 되었지만)가 아니었으며 단순히 영구의 율타이드(Yuletide)절기와 같은 것이었다. 추수감사절은 일반적으로 목요일 날 지켜졌는데, 그 이유는 목요일이 강연 일로서 매우 인기 있는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관습이 보다 확고한 기반을 갖고 남부지방으로 퍼져 나가게 되자 각 주의 정치가들은 이 추수감사절을 각 주의 연례 행사로 정하는 문제를 정식으로 토외하게 되었다. 한편 1840년대에Godey's Lady's Book의 편저자였던 사라 요세파 헤일 여사는 추수감사절(11월 마지막 목요일)을 미국 전역의 연례적인 절기로 지킬 것에 대한 캠페인을 벌였으며, 1863928일에 추수감사절을 미국 전역의 연례적인 축일로 선포할 것을 촉구하는 서신을 그 당시 미국의 대통령인 링컨에게 보냈다. 그로부터 4일 후 링컨은 추수감사절을 미국 전역의 연례적인 절기로 공포하였다. 그 전 까지만 해도 감사일이나 기도 일에 대한 대통령의 선포는 연례적인 것이 아니었으며 또한 추수기와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그러나 1863년 이후로 모든 대통령들은 링컨의 전례를 따랐으며 행정부도 이를 뒷받침해 주었다. 따라서 1941년까지 추수감사절의 날짜는 대통령의 연례적인 선포에 따라 각기 달랐으나 1941년에 미국 의회는 대통령과의 합의 아래 11월 네번째 토요일을 추수감사절로 정하고 이날을 휴일로 공포하였다. 비록 의회는 이 추수감사절로 정하고 이날을 휴일로 공포하였다. 비록 의회는 이 추수감사절 날짜를 확정지어 놓고 있으나 대통령은 계속하여 링컨이 1863년에 시작한 전례에 따라 매년 추수감사절 날짜를 선포해 오고 있다.


6. 한국의 추수감사절

한국 교회에서 감사절을 지키기는 1904년부터이다. 4회 조선예수교장로회 공의회에서 서경조 장로의 제의로 한국교회에서도 감사일을 정해 지키기로 하였다.

우선 다른 교파 선교부와 협의하여 그 날짜를 정하기로 하고 우선은 1110일을 추수감사절로 선정하여 장로교 단독으로라도 지키기로 하였다.

그후1914년 각 교파선교부의 회의를 거쳐 미국인 선교사가 처음으로 조선에 입국한 날을 기념한 매년 11월 제 3주일 후 3(수요일)을 감사일로 정하여 예배를 드리고 감사헌금을 모아 총회 전도국에 보내 전도사업에 쓰기로 하였다.

그후 수요일을 일요일로 변경하여 매년 11월 셋째 주일을 추수감사절로 지켜 오늘에 이른다.

그러나 현재 한국교계 일각에서는 한국농촌의 실정에 맞는 시기인 중추절(추석)을 전후해서 한국교회다운 추수감사절을 새로 지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고 이를 시행하는 몇몇 교회와 교파도 있다.


 

Focus on 2 "기독교와 조상제사"

 

기독교가 우리 전통 문화의 조상 숭배와 관련하여 수용할 수 없는 요소들과 수용할 수 있는 요소들을 정리해 보기로 하자. 어떤 이들은 조상 제사를 금지함이 기독교의 선교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조상 제사를 허용하는 것이 반드시 선교를 잘되게 한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조상 제사가 기독교 선교 현장에서 많은 갈등을 일으킨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상 제사를 결국 수용한 천주교보다 아직도 금지하고 있는 개신교가, 그리고 조상 제사를 허용한 진보적인 교회보다 그렇지 않은 보수적 교회가 더욱 성장한 것은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조상 제사가 기독교 선교에 방해가 된다는 단선적인 논리를 지양하고, 조상 제사에서 기독교가 수용할 수 없는 요소들과 수용할 수 있는 면들을 분리해서, 기독교의 본질적 내용을 훼손시키지 않는 범위에서 한국 전통 문화의 긍정적 요소들을 수용해야 할 것이다.


1. 조상숭배 제사에서 기독교가 수용할 수 없는 요소들

(1) 기독교는 조상을 제사를 받을 수 있는 하나의 신으로 여기며, 신에게 제사하듯이 절하고 제사하는 것과 지방을 쓰고, 제상을 차려 올리고, 향을 피우고, 절을 하는 것 등을 받아들일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예배를 받으실 하나님은 오직 한 분뿐이며, 그 외 어떤 존재라고 신적 위치에 올려놓는 것을 우상 숭배로 여긴다(20:3-5).

(2) 기독교는 조상의 신령이 복과 화를 내린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우리는 인간의 삶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달렸다고 믿으며, 조상신이 주관한다고 믿지 않는다(45:5-7).

(3) 기독교는 조상을 천신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 격으로 생각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신적 중보자는 오직 유일하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라고 믿는다(2:5-11, 4:12).

(4) 기독교는 죽은 조상의 혼령과 교통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우리는 살아 있는 인간이 하나님의 성령과 지시를 따르는 천사가 아닌 어떤 존재와도 영적 교류를 가질 수 없으며, 또 가지는 것을 금하고 있다고 믿는다(19:31, 20:27, 18:10-12).


2. 조상숭배 행위에서 기독교가 이어 취할 수 있는 문화적 요소들

(1) 부모에 대한 공경.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과 행위를 가져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의 윤리는 기독교의 가르침과 조화될 수 있다.

(2) 세상을 떠난 조상에 대한 추모, 문제는 이미 세상을 떠난 조상에 대한 공경인데, 우리는 그들을 신령으로 여겨 제사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 우리를 세상에 내시고, 양육해 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하고, 그들의 생전의 삶에 대하여 추모할 수 있다. 특별히 조상이 남긴 신앙의 모본과 교훈을 되새기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일 것이다.

(3) 성묘, 우리는 조상의 무덤을 찾아 성묘하며, 부활의 소망을 일깨움도 유익하다고 본다. 그러나 성묘의 경우 우리는 유교나 불교 혹은 무속의 복잡한 체계를 믿지 않으므로 삼우제(三虞祭) 등과 같이 날짜에 매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4) 그리스도안에서 조상들과의 연합의 문제. 한가지 생각해 볼 것은 세상을 떠난 조상들과의 교통의 문제이다. 이미 지적했듯이 우리가 조상의 영혼과 직접적으로 교류함은 허락되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을 떠난 조상들도 그리스도 안에 있고,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직접 조상들의 영혼과 교류할 수는 없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간접적으로 일치하고 있으며, 조상의 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성령 안에서 일치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점은 그간의 추모예배에서 부족했던 측면이라고 생각된다.


3. 추모예식 제안

(1) 돌아가신 부모가 신자였을 경우 : 추모예식 자체나 그 내용에 있어서 별 문제가 없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 나라에서도 기독교 가정에서는 이미 추모예식이 하나의 전통으로 자리잡혀 가고 있으므로 별 문제가 없을 것이다.(간혹, 고인이 신자였으나 유가족이 불신자인 경우가 있는데, 이는 유가족이 거부하지 않는다면 함께 한 교우들과 친지들과 함께 위와 같은 기독교적 추모 예식으로 할 수 있을 것이다.)

(2) 돌아가신 부모가 불신자였을 경우 : 이 경우 문제를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보자.

- 먼저 유가족이 모두 기독교인인 경우 : 조상 제사 대신 추모예식을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경우 추모예식의 내용에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다. 유가족은 고인의 구원을 믿을 수 없고, 또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과의 교류도 믿을 수 없다. 또 추모예식 시에 부를 찬송도 마땅치 않다. 현재 우리의 찬송가책에는 부모를 생각하는 노래들이 몇 곡 있는데, 모두 그 부모가 신앙의 유산을 물려준 신자였던 부모들에 대한 노래들 뿐 이다. 믿지 않는 부모를 모셨던 이들이 그런 노래들을 부를 때, 얼마나 어색하고 이상하겠는가? 이 경우에는 구원론적인 접근보다 창조론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즉 비록 부모가 불신자들이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분들을 통해 우리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고, 또 그분들을 통해 사랑의 양육을 받도록 창조하시고 섭리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므로, 우리는 그 조상들을 우리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일반은혜에 감사하는 예배를 드릴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불신자였던 부모를 모셨던 이들도 함께 부를 수 있는 찬송가의 개발이 필요하다. 또한 추모예식에 쓸 기도문에 그러한 감사의 내용이 포함되면 좋을 것이다.

- 조상 제사를 하는 가정에서 홀로 신자일 경우 : 이런 경우 많은 신자들이 불효자로 오인 받고, 사랑하는 가족들로부터 핍박을 받기도 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기독교 선교 100년이 넘은 지금, 많은 한국인들은 찬성은 하지 않을지라도 기독교인들은 조상의 위패나 제상 앞에 절하지 않는다는 점을 대개는 알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믿음이 약한 신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그들로 하여금 그러한 어려운 환경을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교육하고, 기도하며 도와줄 필요가 있다. 이 경우 당사자인 신자는 사전에 가족 어른들에게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조상을 공경하기는 하나, 기독교의 를 따라 절은 하지 않음에 대하여 양해를 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경우 절하는 대신 사진이나 위패 앞에 단정히 앉아 묵념으로 대신하는 것도 하나의 대안일 것이다.(이는 이미 대부분의 신자들이 문상하는 때에 실제로 하고 있는 바이기도 하다.) 아무 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어른들에게 미리 양해를 구하고, 묵념을 함으로써 조상에 대한 공경의 마음이 있음을 표시하는 것이 불필요한 오해를 조금이나마 줄이는 방법일 수 있을 것이다.

(3) 기타 : 또 한가지 생각할 것은 류순하 교수가 제안한 바 그리스도 안에서 산 자와 죽은 자의 연합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이미 제사를 통해 조상과 직접 교류한다는 것이 매우 위험한 발상이라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그가 제안한 바,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와 산 자가 하나이라는 생각은 고인이 신자였을 경우에는 성경적으로 합당한 생각이다. 따라서 우리는 죽은 자를 직접 만날 수는 없지만, 그리스도의 성령 안에서 함께 있다는 믿음의 고백과 감사의 기도를 추모예식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우리가 판단하건대 조상 제사는 기대하는 것과는 달리 조상과의 어떠한 참된 교류도 실제로 제공하지 못한다. 그보다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이 연합이 오히려 깊은 의미에서 죽은 조상과의 진정한 일치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연합에 대한 의식은 추모예식을 더욱 뜻 깊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4) 추모예식 기도문의 예 : 다음은 위와 같은 생각들을 정리하여 만든 가정용 추모예식 기도문의 예이다.

- 만물의 창조자이시며 우리 인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저희를 부르시사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의 도우심으로, 죄와 죽음 가운데 있는 저희에게 영생과 부활의 소망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오늘 저희는 돌아가신 ○○○를 추모하여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은혜로우신 창조주 하나님, 하나님께서 ○○○를 세상에 보내 주시고, 그를 통하여 저희에게 생명을 주시고, 온갖 사랑의 보살핌을 받게 하셨던 것을 감사합니다. 고인이 살아 있을 때, 여러 가지 어려움도 있었지만, 그 모든 일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로 서로 정을 나누며 살게 하셨던 것을 기억하며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그러한 은혜에도 불구하고 저희가 하나님과 고인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모든 허물과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는 저희를 떠났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저희에게 주셨던 사랑과 교훈들을 기억하며, 날마다 주님의 위로와 하나님 나라의 희망 가운데 살게 도와 주시옵소서. [특별히 저희가 그를 통하여 물려받은 신앙의 유산을 잘 간직하여, 믿음으로 살아가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자비로우신 하나님. 이제 ○○○는 이 세상을 떠났지만, 그는 우리 주님 품안에 쉬고 있음을 저희는 믿습니다. 지금 비록 저희는 직접 그를 만나 볼 수는 없으나, 주님 안에서는 우리가 하나로 연합되어 함께 있으니, 그 은혜를 감사하오며, 이후에 주님을 영광 중 뵈올 때, 가를 다시 만나 볼 희망이 있으니 또한 감사합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 여기 산 자나 또한 죽은 자나 모두 주님 손에 있사오니 저희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이제는 저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서 이 세상의 모든 슬픔과 고난을 기쁨으로 이기게 하시고, 하나님의 나라와 뜻을 이 땅에서 이루며 살게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 괄호는 특히 고인이 신자였을 경우에 사용하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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