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25일 하나님 사랑, 사람 사랑 from godswill on Vimeo.
하나님 사랑, 사람 사랑,
마 22:34-40.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가치가 있다면 저는 그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구원’도, 그 구원의 삶이 이루어지는 나라인 ‘하나님 나라’도 그것을 한 마디로 표현하라면 ‘행복’이라는 단어와 개념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 이하의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 이니라’는 말씀만 보아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생각과 소원이 오로지 우리의 행복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행복, 다시 말해 구원과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무엇을 통하여 이루어지는가 할 때 우리는 그 답을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주기도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해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뜻과 말씀이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쉽게 말해 예수님은 구원과 행복을 하나님의 뜻에서 찾으셨습니다. 말씀에서 찾으셨습니다. 요한복음 8장 32절에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 말씀에서 말씀하신 자유는 구원을 의미하는 큰 자유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자유가 진리를 통하여서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맞습니다. 구원은 말씀 속에 있습니다. 행복은 하나님의 뜻과 식 속에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과 행복과 하나님 나라를 잃어버린 것은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 하였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 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자신의 욕심을 따라 제 멋대로 살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우리 인간은 실낙원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삶의 구원과 행복을 욕심낸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식에 집중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대신하여 오늘 본문의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율법이 무엇입니까? 율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를 물었습니다. 이 엄청난 질문에 예수님은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사랑을 율법의 완성이라고까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사는 것이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성경에 기록된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랑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렵지 않았습니다. 제 마음과 삶속에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넘치는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의 대표가 제게는 ‘손녀 사랑’입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요즘 손녀들 사랑에 빠져 있습니다. 때문에 사랑이 무엇인가를 정리하고 정의해 보려면 그냥 우리 손녀 딸들 생각하면 됩니다. 우리 손녀 딸들에 대한 제 마음과 생각과 삶이 그냥 곧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모든 사람을 다 우리 손녀 딸 대하듯 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관심입니다. 어디를 가든,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한 순간도 우리 아이들을 잊지 못합니다. 잊을 수 없습니다. 제가 늘 가지고 다니는 휴대전화, 아이패드, 노트 북 어디에나 제 손녀 딸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 볼 뿐만 아니라 만나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자랑합니다.
첫 손녀를 낳았을 때 우리 손녀 민희는 계룡대라는 곳에서 살았습니다. 다녀오려면 왕복 5시간에서 6시간 정도를 잡아야만 했습니다. 하루 중 7시간만 비면 미친 사람처럼 계룡대를 향해 갔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첫째와 둘째는 멀리 미국에 있지만 한 순간도 잊은 적 없습니다. 막내 손녀는 가까이에 있습니다. 가까이에 있으나 멀리 미국에 있으나 관심과 사랑은 차이가 없습니다. 저는 거의 우리 손녀의 사소한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얼마 전 큰 손녀와 전화를 하는데 기침을 조금 심하게 하는 듯 보였습니다. 싫었습니다. 계속 큰 아이 기침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저는 여행을 다닐 때 거의 큰 가방을 가지고 다니지 않습니다. 처음 안식년 할 때 약 두 달을 쉬지 않고 미국과 카나다 유럽 그리고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를 여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도 핸드캐리 하나만 가지고 다녔습니다.
요즘도 대개 그렇습니다. 그러나 손녀딸이 사는 미국 뉴욕에 갈 때는 언제나 가방이 이민가방입니다. 어떤 때는 미국 세관원에게 가방을 열고 그것을 보여주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저는 그것은 무척 신경 쓰이고 불편합니다. 그래도 상관 없습니다. 하여튼 뉴욕에 갈 때는 이민 가방을 가지고 갑니다.
거기에는 대부분 손녀 딸들의 선물이 있습니다. 손녀 딸들이 구하지 않아도 저와 제 아내가 혼자 다 알아서 이것, 저것 거의 닥치는대로 다 사서 가지고 갑니다. 저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도 같으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구하기 전에 벌써 미리 다 아시고 그것을 주시고 싶어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저는 정말 굳게 믿습니다.
아이들이 결혼하기 전 우리 집 식구는 여섯 이었습니다. 저는 제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여섯으로 나누었습니다. 그것을 나누는 것이 조금도 힘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기쁘고 즐거웠습니다. 그만큼의 몫을 가족들에게, 특히 아이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다는 것이 기뻤습니다.
어느 날 새벽기도를 하는데 하나님이 제 마음에 느닷없이 ‘난?’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귀를 못 알아들었습니다. 하나님이 다시 제 마음에 ‘아버지라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야 알아 차렸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우리 가족의 수에 넣지 않았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이 섭섭해 하셨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계산을 정말로 다시 하였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1/7로 계산하였습니다. 그때부터 하나님은 진짜 제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제 가족이 되셨습니다. 식구가 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부족하지만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그 계산도 바꾸어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몫을 내 가족과 아이들의 몫과 같이 셈하였다면, 사람을 사랑하기 위하여서도 똑 같은 몫을 떼어야만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몫을 1/7이 아닌 1/8로 하고 최소한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의 1/8은 내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몫을 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게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11년 째 금전출납부를 씁니다. 저는 목사인데 제법 적지 않은 돈이 매달 들어오는 사람입니다. 교회에서 주는 생활비, 강사비, 인세등등 제법 만만치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보다 더 많은 돈이 생긴다고 싫어하겠습니다. 그 돈이 많아서 다 쓰지를 못하길 하겠습니까?
그 돈을 다 내 돈이라고 나만을 위하여 쓰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약속을 하였습니다. 나에게 필요한 몫을 정하고 하나님과 이웃들을 위하여 쓰는 몫을 정하였습니다. 그것을 금전출납부 맨 앞장에 써 놓았습니다.
하나님 1/8, 이웃 1/8이면 둘을 다 합쳐 1/4 즉 25% 정도를 떼면 됩니다. 그렇게 꼭 돈을 뗀다고 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지만, 저처럼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사람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11년 정도 연습을 하니 이젠 하나님과 세상을 위하여 몫을 떼는 것이 조금 쉬워졌습니다. 조금씩 쉬워지다 보니 실력도 조금씩 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저와 저희 가족 모두를 위하여 쓰는 몫과 하나님과 사람들을 위하여 쓰는 몫이 거의 비슷해졌습니다.
역설적으로 그렇게 하였더니 제 마음속에 하나님과 사람이 점점 더 사랑스러워져가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엇을 하든 나와 내 가족만 생각하지 않게 되었고 하나님과 사람과 세상이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내 손녀 딸들만을 위하여 챙기던 이민 가방을 이제는 내 손녀 딸이 아닌 인도와 아프리카와 북한을 위하여서도 챙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손녀 딸을 보기 위하여 왕복 6시간을 운전하고 시간이 없어서 50분만 손녀를 안아 보고 되돌아오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 제가 계룡대를 운전하여 오가며 느꼈던 행복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을 위한 몫을 구체적으로 떼면서부터 그 행복의 지경이 넓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얼마 전에 우리 교회가 세운 열매나눔재단이 섬기고 있는 말라위 그물리라 마을을 다녀왔습니다. 집에서 출발하여 현지에 도착하는데 까지를 계산하면 하루 24시간이 좀 넘습니다. 비행기를 세 번이나 타야만 합니다. 그것을 일주일 사이에 왕복한다는 것은 정말 중노동도 그런 중노동이 없습니다. 그런데 정말 피곤한 줄을 몰랐습니다. 피곤한 줄을 몰랐던 것이 아니라 피곤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이해가 되지 않으리만큼 피곤하지 않았습니다.
미국을 갈 때 동부와 서부를 가는 것이 다릅니다. 동부는 서부를 다녀오는 것보다 비행시간이 거의 5시간 정도가 더 걸립니다. 비행시간이 10시간을 넘어서면 그때부터 한 시간, 한 시간은 정말 힘듭니다. 당연히 동부를 다녀오는 것보다 서부를 다녀오는 것이 쉽습니다. 그런데 저는 반대입니다. 저는 서부를 다녀오는 것보다 동부를 다녀오는 것이 더 쉽습니다. 까닭은 당연합니다. 우리 손녀가 동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말라위 여행이 동부를 다녀오는 것 같이 즐거웠습니다. 작년 7월 그물리라 사역을 시작할 때 인간적으로는 그 앞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일 년 만에 다시 가보니 조금 과장한다면 정말 천지가 개벽한 것 같아 보였습니다. 막연하게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희망이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직원들의 숙소와 사무실이 지어졌습니다. 주민들을 위한 보건소가 지어지고 창고가 지어지고, 학교 교사들을 위한 사택이 지어졌습니다. 보건소에 상주하는 간호사가 살 사택도 지었습니다. 학교도 곧 지을 겁니다. 이제 곧 마을에 전기도 들어오게 될 겁니다. 정미소도 세우고 주둥이가 넓적한 곡괭이 하나로만 농사를 짓던 동네에 농기구 뱅크가 세워질 것입니다.
영아 사망률이 눈에 뜨게 줄어들고, 저들의 소득은 전과 비교도 되지 않게 높아지게 될 겁니다. 벌써 그물리라는 굶지 않게 되었고 이제 그곳의 아이들은 우리들이 신발을 사주지 않아도 옷을 사주지 않아도 자기 엄마 아버지들이 신을 사서 신기고 옷을 사서 입힐 수 있게 될겁니다.
얼마나 행복했는지 이루말로 다할 수 없었습니다. 어제 함께 동행을 하였던 장로님 한 분으로부터 문자 메시지가 왔습니다. “KBS에서 지금 아프리카 말라위 모습이 기획 방송되고 있습니다. 2주전의 눈물이 다시 나려고 합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행복입니다. 그런데 그 행복이 숨어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행복을 잘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행복이 숨박꼭질을 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행복을 찾으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행복을 돈에서 권력에서 세상 쾌락에서 찾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 속에 행복이 있는 줄 알고 열심히 그것을 좇지만 다 꽝입니다. 행복은, 구원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식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과 식은 단 하나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율법이 다 완성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 누굽니까? 아내입니까? 남편입니까? 자식입니까? 그 사랑의 지경을 하나님과 세상으로 넓혀보세요. 일주일 사이에 50시간 비행기를 타도 피곤치 않을 겁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다 천국으로 보일겁니다. 밤낮 자기와 자기 가족만 생각하며 살지 말고 하나님도 생각하고 이웃도 생각하며 사실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스크랩 >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헌금의 일곱가지 원리 /이동원목사 (0) | 2020.04.21 |
---|---|
하나님 사랑, 세상 사랑(요한1서 2:12-17) / 옥한흠 목사 (0) | 2018.08.10 |
가장 큰 계명(마22:34-40) / 정필도 목사 (8) | 2018.08.10 |
잠3:9-10 감사 신앙일 읽어버리지 마라 [유기성목사] (0) | 2018.07.04 |
지금이 기회입니다 (이사야 55:6-9) 정필도 목사 (0) | 2018.06.0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