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금의 일곱가지 원리 / 이동원 목사
오늘 본문에서(고린도전서16장) 우리는 일반적인 그 헌금의 가장 중요한 몇 가지 기초적 원리들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한 7가지 중요한 원리. 우리가 언제, 어느 때, 어떤 명목으로 헌금을 하든지,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할 헌금의 가장 중요한 한 7가지 원리들을 오늘 우리가 이 본문에서 우리가 배울 수가 있습니다.
우선 첫째로 저는 헌금의 가장 중요한 원리는 헌금은 자율적인 것이다.
자원함으로 드려지는 헌금이어야 한다. 우리 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다같이 시작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우선 연보라는 단어자체가 로기아 라는 단어 인데, 이 단어의 뜻이 자율적으로 드려지는 헌금이라는 뜻입니다. 자원에 의해서 드려지는 헌금. 이것은 강제적인 어떤 세금과 매우 비교가 되는 그런 단어입니다. 그 단어 자체가. 헌금은 우선 자원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자원하는 마음이 없으면 그것은 아무리 많이 드려도 그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나중에 고린도 후서에서 바울은 좀 더 이 헌금문제를 다루면서 억지로 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자원하는 마음에 의해서 드려져야 한다. 기쁜 마음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헌금의 진정한 목적을 이해하고, 그 자율성에 의해서 드려져야 한다. 이것이 헌금의 첫번째 원리.
두번째로 헌금에는 의무적인 차원이 있습니다.
자율성의 차원이 있는 반면 의무적인 차원이 있습니다. 동시에 성도의 의무임을 깨닫고 드려야 한다. 두번째 원리가 헌금은 자율성이라는 측면이 있지만, 또하나 동시에 또한 헌금에는 어떤 의무적인 차원도 있어요. 분명히 있어요. 분명히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기 1절에 보시면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헌금을 가르치고 권고하면서 그것을 명령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주목해서 보시길 바랍니다.
헌금에 영역에 있어서도, 자율성과 동시에 또한 의무성에 염력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헌금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해도 좋고 안해도 좋은 옵션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은 의무의 문제입니다. 바울은 그래서 내가 여러분들에게 헌금하라고, 호소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호소하지 않아요. 나는 여러분에게 명령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이라 하면 마땅히 그렇게 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의무의 차원에서 동시에 여기에서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고, 헌금의 두번째 원리는 이것은 성도의 의무임을 깨닫고 드려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마땅히 해야할 의무임을 깨닫고, 그렇게 해야한다는 사실입니다.
세번째로 헌금의 또 하나의 원리는 규칙적으로 드려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규칙적으로 자, 2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매 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네, 헌금을 규칙으로 모아서 이렇게 드리는데, 네 어떻게, 언제마다 모으라고 그랬어요? 매주일 첫날에 모아라. 매주일 첫날에. 매주일 첫날에 이렇게 모으라고 한 이유는 매 주일 여러분들이 모일 때, 교회의 모임으로 모일 때 안식후 첫날에 한주가 시작되는 첫날에야, 안식 후 첫날 주일이 주일의 첫날이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의 시간 계산법으로는 그래서,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월화수목금토일 맨 끝에 있는것 처럼 생각되지만 사실은 일. 첫날 일 월화수목금토일 이렇게 되는데, 주일 첫날에 첫날에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안식 후 첫날에 그들은 함께 모였습니다. 모여서 주님을 경배하고 떡을 떼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그 때마다 그때마다 이렇게 모아서 바울이 그 전체를 가지고 갈 수 있도록 그렇니까 주일날 마다 헌금을 규칙적으로 드리도록 권고한 말씀으로 우리는 이 말씀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왜 규칙적인 헌금이 중요할까요? 규칙적인 헌금은 우리의 규칙적인 헌신의 표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헌신 그것은 규칙적인 헌신이예요. 그냥 마음대로 개판으로 살다가 어느날 갑자기 헌신한다. 안하는 것 보다는 낫지만 그것은 매우 감정적인 것이고, 불안한 것이고, 그것은 우리의 삶이 될 수가 없어요. 우리의 신앙이 삶이 되어야 하는데 라이프 스타일이 되려면 규칙적이어야 합니다. 규칙적이 된다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막 보통 때는 안하고 있다가, 나중에 생각나면 일년에 한번 왕창한다. 아무리 많이해도 저는 그것이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헌금의 태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늘 규칙적으로 주님 앞에서 살아간다면 그것이 규칙적인 나의 헌신을 점검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네게 주신 것의 한 일부를 주를 향한 우리 신앙의 고백으로 드릴 수 있을 때, 규칙적 헌금은 우리의 규칙적 헌신의 표현일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규칙적으로 드려야 한다.
그 다음 네번째 원리는 비례적으로 드려야 한다.
비례적으로 드려야 한다. 여기 2절 우리가 읽은 말씀에 매 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무엇을 얻은 대로 그랬어요? . '이를 얻은 대로 많이 얻으면 많이 얻은 대로 , 적게 얻으면 적게 얻은 대로 이를 얻는 대로 드려야 한다.' 저는 이 개념 속에는 헌금은 십일조 이상의 것이다라는 그런 정신이 들어 있다고 생각해요. 십일조는 구약시대부터 하나님의 백성들의 하나님을 향한 그림에 있어서 어떤 최저의 라인이었다고 할 수가 있어요.
영어로 Bottom line(최저라인)이라고 하는데, 아주 최최 최저의 어떤 기본적인 헌신의 표시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에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꼭 십일분의 일만 드린 것은 아니였어요. 레위인들을 향한 십일조, 그러니까 풀 타임으로 하나님의 사역에 전념하는 사람들의 그 삶을 생계를 서포트(support)하기 위해서 지원하기 위해서 소위 레위인들을 위한 천막 공사자들을 위한 십일조를 드렸고, 그리고 또 하나의 십일조를 드렸는데, 회식의 십일조를 드렸어요. 회식의 십일조. 이것은 명절날 종교적 성격을 지니는 특별한 명절,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 이런 절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예루살렘으로 모여와서 한 주간씩 축제를 보내고, Celebration을 할 때, 축제를 할 때,그 때 쓰게 될 회식을 위한 특별한 십일조를 그들이 또 드렸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3년의 한번씩은 소위 구제의 십일조를 드렸어요. 3년의 한번씩 그들은 규칙적으로 구제의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나그네, 과부, 고아 이런 약하고, 병들고 그리고 누군가의 사랑과 도움이 없이는 삶을 지탱할 수가 없는 그런 이웃들을 위해서 구제의 십일조를 3년마다 한번씩 드렸어요. 이걸 다 합하면 난 계산이 정확하지 못해서, 정확하게 계산하는데 20%는 하여간 넘고 23% 쯤 되지 않을 까 생각합니다.
훨씬 구약시대에도 십분의 일 소위 Ten Percent , 10 퍼센트보다 훨씬 더 많이 드렸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신약에 와서는 꼭 십일조라는 개념이 자주 강조되지 않습니다. 단지 신약에서는 후히 드려라. 후히 넘치도록 후히 드려라. 많이 심은 자는 많이 거둔다라는 원리적인 측면에서만 신약성경은 헌금을 강조합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우리가 이를 얻은 대로 더 많이 축복을 받으면 더 많이 드릴 수가 있어야 한다.
옛날에 어떤 사람 하나가 하나님 제가 꼬박 꼬박 십일조를 드릴께요. 아주 이사람이 불가 한 한달에 10불정도의 작은 월급을 받던 소년 하나가 하나님 1불을 드리면서 하나님이 내가 꼬박 꼬박 십일조를 드릴테니까, 평생 이것을 이행하겠습니다. 더 많이 주시면 더 많이 십일조를 드리겠습니다. 그래서 10불에서 1불을 드렸대요. 그리고 그 다음에는 100불을 얻게 되었어요. 그래서 10불을 드리게 되었어요. 근데 1000불을 받으니까, 그러면 얼마를 드려야 합니까? 100불. 그러니까 더 많이 드릴수록 어떻게 될까요? 더 어려워 지는 것예요. 그런데 거까지도 했어요. 이사람이 . 근데 나중에 한달에 드디어 10000불을 벌게 되었어요. 10000불이니까 얼마를 드려야 되요? 점점 더 더 많은 수입이 되니까 드리기가 힘들어 진다 말이예요. 1000불을 드리니까 벌벌벌 떨리기 시작하는 것예요. 근데 이사람이 솔직한 사람이라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를 "하나님 솔직히 더 많아 지니까, 그 만큼 그 비율에 따라서 더 많이 드린다는 것이 훨씬 어려워 지는데 어떻게 할까요?" 하나님의 조용한 음성이 들려 오더래요. "그러면 옛날 처럼 10불만 벌게해주마"
하하하하하, 우리가 더많이 드릴 수 있다는 것이 축복이예요. 그 만큼 내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인정하는 거라 말이죠. 그래서 이를 얻은대로 드릴 수가 있어야 한다. 헌금의 중요한 원리 가운데, 하나. 비례적으로 드려야 한다. 이 네번째 원리입니다.
그럼 다섯번째로는 준비하고 드려야 한다.
헌금의 또 다른 원리는 준비하고 드려야 한다. 2절에 매 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때에 그 때 갑자기 연보를 하지 않도록 하라. 늘 준비된 마음으로 드려라. 이 준비된 마음으로 예배의 자리에 나온다는 것도 얼마나 중요합니까. 우리가 새 가족반 같은 시간 , 우리가 성경공부 하면서 강조했습니다만, 예배는 준비된 만큼 더 정성스럽게 드릴 수가 있어요. 뭐 우리가 어쩌다 보면 예배 시간에 늦을 수가 있죠. 그건 우리가 이해하는데, 어떤 분들 보면 찬양시간 다 빼먹고 설교 시작할 때 왔다가 나가시는 분들 있어요. 그건 합당한 예배가 아니죠. 예배 정신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차라리 예배 시간 전에 와서 5분, 10분이라도 마음으로부터 준비하고 드리면 더 온전한 예배를 드릴수가 있단 말이예요. 어떤 사람은 5분의 4예배, 어떤 사람은 3분의 2 예배. 그래서 아, 예배 시간이 너무 안 맞아서 그러나. 예배 시간 바꾸어 보면 마찬가지예요. 바꿔도 꼭 15분 지각하는 사람은 항상 습관적으로 15분 지각해요. 천국에 가서도 15분 지각할 것 같예요. 준비된 마음 예배 정신 가운데 중요한 것이 준비된 마음예요. 헌금도 마찬가지예요. 준비된 헌금. 미리 하나님 앞에 준비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나오는 것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헌금에 있어서 준비의 정신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는 성경에 나타난 모든 연보에 교훈을 우리가 공부할 때마다 매우 일괄성 있게 강조되는 중요한 교훈 가운데 하나입니다. 준비된 마음으로 드리자.
여섯번째 은혜의 응답으로 드려야 한다. 은혜의 응답으로써 드려야 한다.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써 드려야 된다. 3절에 보면 헌금에 관한 독특한 표현 하나가 등장합니다. 우리 3절 다같이 읽게 습니다. 시작 내가 이를 때에 너희의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라 자, 지금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이 헌금한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가기를 원했단 말이죠. 근데 헌금을 가지고 간다 이런 표현을 쓰지 않고 여기 3절에 뭘 가지고 간다고 그랬어요. 은혜를 가지고 간다. 그랬어요. 은혜를 가지고 간다. 헌금은 은혜다. 다같이 헌금은 은혜다. 어떤 의미에서 이 은혜란 단어를 썼을까요? 우선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예요. 믿습니까? 그렇게 고백하십니까? 예 , 우리가 은혜를 받은 자들이예요.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뭘 얻었어요.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뭐예요 선물이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자격이 전혀 없었던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놀라운 은혜, 그 은혜로써 구원을 받고, 그 은혜로써 성령을 체험하고, 그 은혜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그 은혜로써 하나님의 축복들을 체험했어요. 한마디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의 은혜의 빚진 인생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은혜 받은 자들이예요. 은혜 받은 자들. 은혜의 빚진 자예요. 그래서 헌금할 때에는 뭐냐하면, 은혜의 빚진 자로써 또 은혜를 보답하는 심정 헌금을 하는 것. 이 헌금이 또한 쓰여질 때, 내가 받았던 하나님의 은혜가 누군가에게 전달되길 원하는 것, 그래서 은혜를 받은 내가 이제 은혜를 나누는 것 그것이 헌금 정신이예요. 우리 따라서 하십시다. 헌금은 은혜도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은혜를 나누는 것 이것이 바로 헌금의 중요한 정신 가운데 하나인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헌금은 그리스도인들의 교제를 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교제를 위해서 드려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좀 성서적인 표현으로 말하자면 헌금은 코이노니아 다 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코이노니아. 따라서 하세요. 코이노니아. 코이노니아가 무슨 뜻이예요? 교제라는 뜻이죠. 교제. 교제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교제란 말은 너무나 폭이 좁은 말이예요.
사실 코이노니아란 단어는 매우 심호한 단어예요. 이것은 삶 전체에 참여한다는 의미예요. 그래서 삶과 삶이 연결되는 것이예요. 네가 상대방의 삶속 에 참여하고 상대방이 내 삶에 참여한다는 것이예요. 삶을 나누는 것이예요. 우리가 목장에 모일 때 마다 우리가 같이 우리 마음속의 고통과 아픔과 삶의 문제들을 내놓고 서로 기도합니다. 그리고 서로 격려를 나누어요. 그게 코이노니아예요. 삶을 나누는 것예요. 내가 상대방의 삶에 참여해요, 상대방이 내 삶 속에 참여하는 것이예요.
그러나 너무 어려운 사람을 위해서 우리가 헌금할 수가 있어요. 꾸어주는 것은 하지 마세요. 꾸어 주면 그것 때문에 교제가 깨져요. 꾸어주면 안되요. 드릴수가 있어요. 그냥 드리면 돼요.그러면 절대로 시험이 없어요. 그러나 꾸어주는 일은 하지 마세요. 성경은 꾸어주는 전통은 성경적으로 정당화되지 않았습니다. 너희가 사랑의 빚이외는 빚을 지지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정말 돕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돼요? 그냥 주면 돼요. 헌금해서 주면 돼요. 헌금해서 줄 때 거기에서 진정한 교제가 이루어 지는 것예요. 내가 상대방의 삶에 참여해요. 내가 상대방을 정말 아끼고 사랑한다면 물질까지도 줄 수가 있어야 합니다. 필요할 때 물질까지도 줄 수가 있어야 해요. 실제로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물질로 유무 상통하며 어려운 이웃들을 세워지고 있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자, 사실은 예루살렘교회가 모교회예요. 제일 중요한 교회. 모교회로부터 복음이 선포되고 많은 교회들이 세워졌어요. 이제 예루살렘 교회가 어려움 속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어디서 헌금합니까? 고린도 교회가 헌금을 해서 도와줬을 때, 고린도 교회와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이 어떻게 됩니까? 연결이 되요. 연합이 되요. 얼마나 진한 사랑을 느끼겠어요. 네. 자매 너무 어렵지? 하고 내가 다만 오천원이라도, 만원이라도, 이만원이라도 도와줄 때 우리 정말 이분이 나를 사랑하는 구나. 거기에서 느낄 수가 있단 말이죠. 진한 사랑을 느낄 수가 있어요. 그것이 연결이 돼요. 그래서 헌금은 연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외국의 어떠한 지역을 생각하고, 선교헌금을 했을 때, 그 지역과 우리가 연결이 되요. 갑자기 그 지역과 내가 낯선 지역이 아니고,그 지역에 사는 성도들과 내가 연결되는 것을 느낍니다. 지상에 있는 모든 성도들을 이 선교헌금을 통해서 우리가 연결이 됩니다. 크리스챤들의 코이노니아가 이루어지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헌금정신의 중요한 정신입니다.
- 이동원 목사
출처: https://koinedata.tistory.com/565 [코이네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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