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찬수목사님의 설교 준비 '종이 묵상법' 1. 그가 설교에서 강조하는 것이 바로 묵상이다. -> 그에게는 본문 묵상을 할 때 특이한 자기만의 방법이 있다. 이름하여 '종이 묵상법'이다. 2. 한 책을 택해서 차례대로 강해설교를 쭉 이어가다 보니 설교할 본문이 항상 미리 정해져 있다. -> 그래서 설교하기 몇 주 전부터 본문을 마음에 담는 게 자연스런 1차 설교 준비다. 3. 본문 그 자체만을 반복해서 묵상하라. -> 그는 먼저 본문을 프린트한다. 보기 좋은 글자체에다 행간도 보통의 두 배 정도로 넉넉히 띄운다. 전후 문맥을 알기 위해 21장, 22장도 함께 프린트한다. 그리고 이 종이들을 들고 다니면서 집에서도 읽고, 약속 장소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거나 공항에서 비행기 탑승을 기다릴 때도 들여다본다. 4. 틈새를 모두 본문 묵상에 활용하라. -> 일상에서 틈틈이 생기는 자투리 시간은 남김없이 다 본문 묵상에 쏟아 붓는다. 본문 말씀을 반복해서 읽고 또 읽는다. 물론 그냥 읽고만 끝내지 않는다. 꺼내 놓고 볼 때마다 생각나는 게 있으면 행간 사이사이에 메모해 둔다. 계속 같은 본문을 이리저리 읽다 보면 자연스레 예화도 떠오른다. 그것도 빠짐없이 적어 둔다. 5. 본문을 되새김질 하며 일상의 성도들의 삶과 연결하라. -> 새벽에도 일어나면 먼저 그 주일의 설교 본문부터 묵상한다. 그 주간에는 새벽부터 밤낮으로 그 인쇄된 본문을 들고 다니면서 되씹고 또 되새김질한다. 그러다 보면 일상에서 경험하는 모든 일들이 그 본문을 망으로 하나하나 걸러지는 것을 경험한다. 신문이나 잡지를 읽거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모든 것이 그 본문의 망사에 계속 여과(필터링)된다. 6. 한 초점 맞추기를 하라. -> 이 일상 속의 '한 초점 맞추기'에서 비롯된 집중성과 긴장감은 자신만의 시각으로 본문을 풀어내게 하는 창의성으로 연결된다. 결국 자신의 삶의 컨텍스트를 통해 투과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적절히 검증된 그 말씀이 성도들의 삶의 현장에서도 동일하게 살아 역사하는 열매로 나타난다. 7. 창의적인 영감을 중심으로 가지치기와 접붙이기를 하라. -> 설교 준비 막바지에 이르면 긴장감과 함께 창의적인 영감이 최고의 피치를 올리며 쏟아진다. 그리고 주일 1부 예배 설교가 끝난 뒤에는 강단에서 불가사의하게 주어지는 또 다른 영감이 덧입혀지면서 클라이맥스에 이르게 된다. * 청년사역자들에게 특히 권합니다. 참 좋은 방법입니다. 큐티와 성경연구와 영감의 기록이 두루 녹아 있습니다. 참고하세요. 옥 목사는 설교 준비에 누구보다 많은 시간을 들였다. 옥한흠목사의 설교작성 5단계.
옥한흠목사 설교 철학 - 들리는 설교를 해야 한다 1. 옥한흠 목사는, 예수님의 명령을 좇아 바울이 보여 준 목회의 모범을 받아들여 사랑의교회를 목회했다. 그는 하나님 말씀이 성도들의 삶 속에 살아 움직이도록 하기 위해 다락방 소그룹을 활성화시켰다. 또한, 제자훈련 과정을 통해 무기력하게 잠자고 있는 평신도를 깨워 그리스도의 제자로 무장시키고 목회의 동역자로 삼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와 함께 그가 목회의 최우선 순위를 두고 실천한 사역이 있다. 그것은 설교다. 설교에 대한 그의 집념은 남다르다. 2. 설교를 준비할 때마다 말씀을 있는 그대로 충실하게 가르치려고 노력했고, 목회의 여러 가지 사역 가운데 가르치고 훈련하는 일을 가장 우선하면서 지금까지 달려왔다. … “ 지금까지 설교하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고 목회해 왔는데, 한 번도 이것이 뒤바뀌거나 좌우를 두리번거리면서 방황한 일이 없다.” (옥한흠, “특집/ 평신도 시대를 열자- 평신도와 함께하는 목회,”). 3. 옥 목사는, 설교란 인간에게 있어서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이며,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설교와 청중,”『월간 목회』1984). 또한, 어떤 면에서는 인간이 해서는 안 될 것을 하는 것 같이 느껴진다고 고백했다. 4. 설교자라면 그 누구도 예외 없이 설교에 대한 부담감이 매우 클 것이다. 항상 미흡한데서 오는 고통, 하나님 앞에서 느끼는 죄송함이 설교자라면 누구나 똑같이 느껴질 것이다. 그래서일까? 옥 목사는 “설교에는 대가가 없고, 설교에는 완성이라는 것도 없으며 졸업도 없다”고 규정한다. 그저 평생 싸우고 고통하면서 일만 분의 일이라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갔다면, 그것으로 만족하라고 충고한다. 위대한 설교자로 추앙받는 그도, 여전히 설교의 부담감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알 수 있다. 5. 그는 무엇보다, 설교는 사람들에게 ‘들려야 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들어주는 설교가 아니라, 들리는 설교라야 한다는 것이다. 옥 목사 스스로도, 타인의 설교를 들을 때 마음에 깊이 들어오는 설교가 있는 반면, 귀에 안 들어오는 설교가 있음을 지적한다. 6. 진짜 살아 있는 설교는 영적으로 캄캄한 사람이 아니라면 어떤 마음으로 앉아 있든지 예배에 나온 사람에게 들려야 합니다. 7. 그런 의미에서 설교자는 ‘무엇을 전할 것인가’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지만, 설교를 듣는 청중이 어느 자리에 있는 사람인지를 깊이 고찰하는 눈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사람의 형편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형편을 알면 그들에게 맞는 설교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 메시지가, 듣는 사람의 마음을 회복시킵니다.(옥한흠 목사는 총신대 류응렬 교수와의 대담에서 ‘안 들을 수 없는 설교’가 있음을 강조한다.) 8. 설교자가 성경 말씀을 똑같이 전하더라도 ‘나’를 위한 설교가 있음을 명심하라고 말한다. 그는, 정말 좋은 설교에 대해 ‘설교의 적절성’이란 관점으로 설명한다. 설교의 적절성이란, 성도들이 설교를 듣고 “목사님, 오늘 저를 위해 주신 말씀에 너무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들을 때라고 한다. 청중이 자신만을 향한 설교로 알아들을 때 이것이야 말로 설교의 신비요,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역사하는 증거임을 역설한다. 류응렬, “한국의 명설교가 시리즈3-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리게 하십시오,”『그말씀』, 통권 215호(서울: 두란노서원, 2007. 5), 7-8. 옥한흠,『제자훈련 열정 30년 그 뒤안길의 이야기』, 136-138.) 9. 설교에 대해 그 누구보다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는 옥 목사는, 작금 펼쳐지고 있는 한국교회 위기를 설교에서 찾는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가 지적하는 설교 문제는 지나친 설교 강조로 인한 균형 감각의 상실이다. 옥 목사가 지적하는 사항은 이렇다. 지역마다 대형교회들이 등장하고 개척교회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기면서 서로 치열한 경쟁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주일예배에 몇 명 모이느냐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자연히 사람들을 끌기 위한 전천후 수단은 설교라고 하는 생각이 만연되기 시작했다. 이는, 설교를 평신도의 영적 성장을 위한 절대적인 수단으로 과신했다는 말이다. 설교만 잘하면 성도들의 영적 요구를 만족스럽게 충족시킬 수 있다는 ‘설교 만능주의’가 목회자들의 확신으로 굳어 버렸다고 비판한다. 10. 나아가 설교에 편중된 목회는 제자를 만들라는 주님의 분부에 순종하지 못하게 만들었고, 이에 따라 한국교회는 설교가 평신도를 무력한 군중으로 변질시키는 심각한 원인 제공자가 되었다고 일침을 가했다. 그 결과, 얼마 동안은 양적으로 부흥할 수 있었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 대신 예수님을 배우고 닮고 따라가려는 열정을 가진 제자들을 만드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고 개탄한다. 결국, 설교와 훈련 가운데 지나치게 설교에 편중된 결과 100년 전에 겪은 영국교회의 퇴조 현상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11. 옥 목사는 지금부터라도 편중 목회를 털고, 목회의 균형을 회복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목회자가 각성하고 목회의 본질로 돌아서라는 것이다. 설교학의 교과서 사랑의교회 옥한흠 원로목사Ⅳ 영혼을 살리는 설교자- 국내1 2009년 12월 21일 (월) 07:47:42 권영삼 032kwon@naver.com 지난 11월 27일, 총신대학교 한국기독교사연구소는 ‘사랑의교회 30년 평가와 전망’이라는 학술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이 심포지엄에서 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 박응규 교수는 “한국교회를 깨운 옥한흠 목사의 설교 세계”라는 논문을 통해 옥 목사의 설교는 “개인만의 소유도 아니고, 사랑의교회만의 것도 아니며, 모든 신앙인들에게 그 귀한 의미를 던져야 할 한국교회의 영적 유산”이라고 평가했다. 그만큼 옥한흠 목사의 설교는 한국교회에서 독보적인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옥한흠 목사님, 청중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소통하라. 1. 옥한흠 목사에게 있어 청중 분석은 본능적이고 직감적인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은사라고 볼 수 있다. 그 스스로가, 자신이 설교할 때 눈높이를 어디에 두고 이야기하는지를 직감적으로 아는 능력이 있음을 말한다(“한국의 명설교가 시리즈3-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리게 하십시오,”『그말씀』, p.8). 또한, 오랜 세월 동안 제자훈련을 진행하면서 평신도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영적 상황을 경험하다 보니, 어떻게 설교해야 하는가에 대한 무언의 해답을 얻었다고 진술한다. 2. 청중의 중요성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가, 원래부터 청중에 관심을 가진 것은 아니다. 젊은 시절에는 마음이 뜨거워서 힘 있게 전달하는 쪽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 당시, 청중을 이해하는 면에서 배려가 부족했다고 고백한다(“이달의 설교자-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야 합니다,”『그말씀』, p.26). 세상과 별로 접촉이 없는 교회 안에서 사는 목사도 갈등과 연약함이 있는데, 세상 속에서 사는 교인들은 얼마나 많은 고민과 갈등 속에서 몸부림치고 괴로워할까를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3. 청중과 관련해, 옥 목사는 설교자가 가장 잘 빠지기 쉬운 위험 가운데 하나를 소개한다. 그것은 설교자가 사람을 잘 모르고 설교한다는 점이다. 옥 목사는 기독교의 본질을 ‘만남의 종교’(“설교와 청중,”『월간 목회』, p.83-84)로 규정하면서, 설교자는 하나님의 대변자로서 진리를 정확하게 알고 전할 수 있는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4. 옥 목사는 한국교회 설교자를 크게 보수주의 진영과 자유주의 진영으로 구분하면서, 청중분석과 관련해 잘못된 행태를 비판한다. 일반적으로, 보수 진영에 속한 설교자들이 하나님 말씀의 중요성을 깊이 강조하여 깊이 연구하고 기도하며 묵상하는 데 비중을 크게 둔 것을 아름다운 자세라고 칭찬한다. 그러나 이들은 사람을 깊이 이해하려는 노력이 결여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반대로, 자유주의 전통의 설교자들은, 하나님 말씀보다 인간과 사회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경향성이 강하다고 진단한다. 그들 역시 편향성을 지닌 청중 이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5. 옥 목사가 제시하는 설교자의 청중 이해는, 무엇보다 먼저 인간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설교자는 그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으며,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청중들이 현실적으로 당면한 심각한 문제가 어떤 것이라는 것을 가정, 사회, 정치적으로 알 것을 지적한다. 그럴 때 설교는 듣는 사람들의 심장을 향해 말씀을 쏘는 설교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6. 그렇다면 어떻게 청중을 이해하란 말인가? 옥 목사는 크게 다섯 가지를 주문한다(“설교와 청중,”『월간 목회』, p.83-84). 첫째, 설교자는 강단에 설 때 하나님 앞에 선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이는, 설교자는 전하는 자로서의 도구로 사용되는 인간이고, 청중은 듣는 자로서의 입장에 있는 인간이란 점에서 동일하다는 의견을 피력한다. 설교자가 강단에 서지만, 하나님 앞에서 설교하는 것임을 잊지 말라고 충고한다. 설교자의 양면성을 강조하는 통찰이다. 둘째, 청중에 대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라. 이는 독일의 실천신학자 루돌프 보렌(Rudolf Bohren)의 말을 빌려 강조하는 사항이다. 자신의 설교를 듣는 청중을 놓고 감사하는 것이 청중을 이해하는 첩경이라는 것이다. 셋째, 설교를 듣는 자기 청중에게 비전(Vision)을 가지라. 이는 청중에 대해 부푼 기대감을 갖고 설교하라는 주문이다. 비록 지금은 청중이 신앙적으로 어리고 문제도 많으며 설교를 경청하지 않지만, 하나님은 이 청중을 통해 큰 기적을 이루실 것과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신다는 비전을 갖고 청중을 바라보라는 의미다. 그럴 때 청중을 이해하는 눈이 훨씬 달라질 것임을 강조한다. 넷째, 청중을 창조하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옥 목사는 설교를 카리스마적인 존재로 규정한다. 왜? 설교는 본질적으로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하는 사역이기 때문이란다. 성경 말씀을 창의적으로 깊이 연구하고 성령 충만하면, 자연적으로 카리스마적인 설교에 호응하는 청중이 생길 것이라고 말한다. 설교로 자기 양을 낳는 해산의 축복,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설교자에게 주시는 독특한 선물임을 역설한다. 다섯째, 설교 형식을 지나치게 기계화시키지 말라. 옥 목사는, 설교가 다양성을 띄는 것이 좋고 유연성을 갖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그가 선호하는 설교 방식은 강해설교다. 성경 본문에 충실하고, 그 다음에 현실 적용력이 강해야 하며, 성령의 영감을 통한 호소력이 있어야 된다고 지적한다. 청중을 바르게 이해하면서, 하나님 말씀이 가르쳐 주시고 명령하시는 대로 양심껏 전할 때 설교가 설교다울 수 있다고 본다. 그래야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설교에 대한 옥 목사의 지론이다. 옥한흠목사님, 해산의 수고를 마다 않는 설교 준비를 하라.
1. 옥한흠 목사는 서재에 들어갈 때마다 산실에 들어가는 임산부의 아픔을 지니고 들어간다(“이달의 설교자-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야 합니다”, 『그말씀』, p.27-28). ‘어떻게 설교를 준비하는?’라는 물음에 그는 쉽게 입을 열지 못한다. 2. 그는 성경을 읽고 묵상하다가 임하는 영감 속에서 동기를 찾는다. 거기에 목회자의 느낌과 현실적인 요구를 한데 묶어 목요일까지 구상해 나간다. 정작, 그가 한 편의 설교를 완성하는 날은 늦은 토요일쯤이다. 옥 목사가 일주일 내내 한 편의 설교를 완성하기까지, 실로 해산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3. 옥 목사는, 설교 부담이 가중되기 시작한 1980년대 중반부터는 시간에 쫓기면서도 원고를 철저히 쓰는 버릇을 갖게 되었다. 달변이 못 되는 그로서는, 자신의 약점을 보완해 보려는 일종의 고육지책(苦肉之策)이었다. 4. 그 후, 한 가지 괴벽이 생겼다. 그것은 완전히 준비된 원고를 들고 강단에 올라간 다음에도, 설교하면서 무언가 빠지지 않았나 하는 미흡한 기분 때문에 한 번 하고 난 설교를 뜯어고치기를 잘한다는 점이다. 과거, 그가 담임목회를 할 때 어떤 때는 하루 4번 하는 주일설교가 전부 다를 정도로 씨름했다고 고백한다. 5. 그가 고집스럽게 괴벽스러운 작업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기 발전을 위해서다. 그리고 성령에 민감하기 위해 별로 손해 볼 것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6. 옥한흠 목사는 사랑의교회에서 두 번 정도의 설교 변천과정을 겪었다. 초창기(개척-새성전 입당하기까지 6년)는 대부분 요점만 적은 메모지를 들고 설교했다. 당시, 초신자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내용을 쉽게 전할 뿐 아니라, 청중들과의 교감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이때는 어떤 틀이나 원고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 당시 설교는 문장이 조잡하고, 내용이 중복되었으며, 길이가 들쭉날쭉했다. 7. 그 후 교회를 건축하자마자 1년이 못 되어 출석교인 수가 2천 명으로 뛰어올랐다. 그때부터 옥 목사 설교는 틀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의 고백에 따르면, 설교를 매끄럽게 해야겠다는 생각과 예배가 3부로 이어지면서 시간에 쫓겨 미리 문장이나 내용을 다듬지 않으면 한정된 시간을 넘기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교회의 열악한 환경이, 그로 하여금 과감하게 새로운 시도를 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예전에 비해 설교 시간은 짧아졌는데, 대신 준비하는 시간이 몇 배로 늘어나게 되었다. 8. 준비하라. 준비하라. 준비하라. 성령 안에서! 말씀 안에서!.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설교가로 인정받는 설교학자 고든콘웰대 석좌교수 해돈 로빈슨(Haddon W. Robinson)은 강해설교를 이렇게 정의한다. “강해설교란 성경적 개념의 전달이다. 이 개념은 본문을 그 문맥에 맞게 역사적, 문법적, 문학적으로 연구해서 나오는 것으로, 성령은 이것을 먼저 설교자의 인격과 경험에 적용시키고 그 후에 그를 통해 청중에게 적용시킨다”(Haddon W. Robinson, 『강해설교』, p.23). 강해설교에 대한 총신대 신학대학원 설교학 김창훈 교수의 이론도 해돈 로빈슨과 다르지 않다. 본문이 바르게 해석되어 설교에 반영되어야 하며, 내용 구성과 전개에서 본문에 온전히 지배될 것과 핵심주제가 선명하게 드러나야 함을 전제로 삼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강해설교는 본문을 바르게 적용하는 설교라고 본다. 그렇다면, 강해설교는 설교 형식이 아니다. 설령, 어떤 형식을 지닌다 할지라도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청중의 변화를 위해 설교하는 것이라고 볼 때 이는 ‘설교 철학’인 것이다. 옥한흠식 강해설교 1. 옥한흠 목사의 설교는 어느 하나도 본문과 무관한 설교가 없었다. 그의 설교는 철저하게 성경 본문에 근거하고 있다. 본문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정확하게 파악해서 그 메시지를 잘 전달할 수 있도록 하는 데 모든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면서도 우리의 현실과 동떨어지지 않도록 본문에 맞는 적절한 예화와 적용이 뒤따른다. 때문에, 그의 설교는 강해설교인데도 강해설교를 듣는 것 같지 않게 딱딱하지 않다. 은혜롭고 아주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2. 실제로 그의 설교는, 한국에서 설교 잘하기로 유명한 기성교회 목회자들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것은 그들의 설교가 옥한흠 목사처럼 감동적이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접근 방법에 차이가 있다는 뜻이다. 옥 목사의 설교가 말씀대로의 설교, 본문에 기초한 철저한 강해설교라고 한다면 다른 이들의 설교는 주제설교 쪽에 가깝다. 3. 옥 목사의 설교가 철저하게 본문에 기초하면서도 성경 본문의 상황과 내용의 설명을 통해 청중들의 관심과 흥미를 북돋아 준다고 분석한다. 그러는 동안, 청중들은 성경 본문 밖의 무언가 놀랍고 감동적인 것으로 시선을 돌린다고 본다. 세상적인 방식으로 그들을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니라, 본문에 충실하게 만들면서 청중들을 말씀 속으로 끌어들여 그 의미에 귀를 기울이게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4. 옥한흠 목사 설교가 힘이 있고 감동적인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본문에 대한 정확한 주석과 원문에 대한 정확한 이해, 본문과 관련된 뚜렷한 복음주의 신학이 뒷받침되기 때문으로 분석할 수 있다. 5.이는 청중들에게 본문에 대한 지평을 넓혀 주고, 보다 더 친숙하게 본문에 접근하여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배경을 제공해 주는 것이다. 그는 언어가 지닌 의미를 분석하여 제시하고, 때로는 우리말의 한계를 영어와 헬라어 원문을 동원하여 보충 설명해 본문의 시각을 바르게 교정해 주기도 한다. 6. 옥 목사의 강해설교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성경 지식을 동원한 단순한 본문 분석이 아니라 본문에 귀를 기울여 본문이 말하는 바를 발견하고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하게 한다. 7. 이른바 교회에서 ‘믿음이 좋다’고 평가받는 이들이 가정과 직장에서는 별로 성실한 삶을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성역 없이 비판한다. ‘하나님의 일’과 ‘세상 일’을 구분하면서 “교회에 와서 심방하고 전도하고 성경 가르치는 일은 주님의 일이요, 집에서 설거지하고 아이를 키우는 일은 주님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들의 사고는 이원론적이요, 결코 성경적인 아님”을 강조한다. 8. 이런 비판과 적용은 그의 설교 곳곳에 등장한다. 그만의 설교의 독특성은, 본문에 적절한 예화와 삶의 뿌리를 내리는 적용을 통해 변화를 체험하게 한다는 점이다. 이런 통찰을 경청하고 있노라면, 기독교가 일종의 게토 집단화하여 자기 울타리 안에서만 통용되는 특별한 정서로 무장한 채 사회와 유리되고 있다는 따가운 비판에 대한 예언자적 대안을 듣는 듯하다. 9. 그는 매번 설교할 때마다 결론에서 성경 본문 내용에 걸 맞는 도전을 분명하게 한다. 청중으로 하여금 개인적으로 적용이 가능하며, 현재의 비신앙적이고 비성경적인 삶의 변화를 촉구한다. 된장 뚝배기 같은 그의 설교를 들은 청중은 영적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옥한흠식 강해설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혹한흠목사님, 개혁주의 신학에 기초한 설교를 하라. 1. 옥한흠 목사의 설교가 감동적인 이유는 뛰어난 수사력, 언어적 분석력, 청중을 사로잡는 힘, 본문에 대한 뛰어난 강해 실력 등 다양한 부분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면서도 설교를 힘 있게 만드는 요소는 뚜렷한 개혁주의 신학 사상이 중요한 요인이다. 그의 설교는 개혁주의적인 성격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2. 옥 목사는 성경 전체가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확신하며 설교한다. 제자훈련 교재에서 옥 목사는 자신의 성경관을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 선명한 문장으로 분명히 천명하고 있다. • 성경은 살아 계신 하나님 말씀이다. • 성경은 모두 다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진리로서, 거짓이나 잘못이 하나도 없다. • 신구약 66권은 최종적인 계시이며, 그 이상의 계시는 존재하지 않는다. • 성경은 인간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거룩한 생활을 하게 하는 규범으로서 온전하며 충족하다. • 성경 말씀의 권위는 하나님 자신의 권위로서 독자적이다. 3. 이와 같은 분명한 성경관, 곧 하나님 말씀을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권위 있는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신앙은 그의 설교 여기저기서 나타난다. 또한, 그가 젊은 시절에 제임스 패커(James Innel Packer) 교수의 『근본주의와 하나님의 말씀』을 번역했다. 4. 이 책은 『근본주의와 성경의 권위』)로 출간되었으며 1992년도에 개정판이 나왔다)을 번역한 것과 신학논쟁이 한창 일고 있을 때 한국을 방문해 아담과 하와가 역사적인 실존 인물이라는 사실을 거부하고 진화론을 신빙하는 발언을 한 에밀 브루너(Emil Brunner)를 추종하는 이들을 “성경을 근본적으로 뒤집어엎는 사람들”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 5. 이런 사상은 그가 존경하는 스승들로부터 전수받은 소중한 자산이다. 박형룡 교수, 박윤선 교수, 김희보 교수로부터 신학수업을 받으면서 하나님 말씀을 정확무오한 영감된 말씀으로 받아들여 목회의 소중한 유산으로 삼은 것이다. “이것이 뭐 그리 대단하냐?”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설교자가 성경에 대한 확고한 신앙고백으로 믿고 전하는 것과 믿지 않고 전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옥 목사는 성경에 일어난 사실들을 그대로 역사 속에 일어난 사건으로 믿고, 전하기 때문에 그의 설교가 힘이 있고 설득력이 있는 것이다. 6. 옥 목사는 또,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한다. 본인이 확신한 이 사상을, 설교에서도 확신 있게 선포한다. “욥은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아무런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끝까지 붙들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을 수 없는 수많은 시련을 겪으면서도, 끝까지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저는 욥이 잘나서 그렇게 믿음을 끝까지 붙들고 고난을 겪었다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욥에게 그런 은혜를 주셨다고 믿습니다. … 하나님의 자녀는 슬픔을 못 이겨서 절망할 수 있습니다. 분노할 수도 있습니다. 외기러기처럼 울부짖는 캄캄한 밤을 보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가운데서도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소망을 갖도록 우리 눈을 씻어 주시고 점점 더 높은 곳으로 인도하십니다”(옥한흠, 『나의 고통 누구의 탓인가』, p.110-111). 7. 이 설교는 ‘믿음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잘 드러내고 있다. 다른 설교에서 그는, 하나님이 힘의 원천이시란 사실도 극명하게 나타낸다. 하나님께서 힘의 원천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힘을 공급받기 위해서는 그의 말씀을 부지런히 먹고 마음에 담아야 할 것을 강조한다. 8. 그는 또, 삼위일체 중 성자이신 그리스도 중심적인 설교를 지향한다. 옥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고 설교한다. 그런가 하면, 완전한 통치자요, 쉼의 원천이시며, 구원자요, 사탄을 정복하시고 인생의 모든 문제의 해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기도 한다. “우리의 갈등, 탄식, 회개의 눈물이 구원의 수단은 아니지 않습니까? 아무리 탄식을 많이 해도 그 탄식이 우리를 구원하는 조건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호라’하고 탄식할 때마다 재빨리 예수님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죄 때문에 고통하고 괴로워하다가도, 금방 일어나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기뻐하며 할렐루야를 외쳐야 합니다. 왜요? 우리의 상한 마음을 싸매시고 눈물을 씻겨주시는 분이 예수님 외에 누가 있습니까? 우리의 약함과 허물을 용서하시고 하나님 앞에 떳떳하게 들어갈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주시는 분이 예수님 외에 누가 있습니까?” 9. 아울러, 성령의 역사 또한 그가 즐겨 다루는 주제다. 믿게 하시고 체험케 하시는 성령,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시키시는 성령, 불완전한 기도를 온전케 하시는 성령의 역사도 그의 설교에서 빈번하게 등장한다. 이러한 옥 목사의 인식은 칼빈(John Calvin)과 그 추종자들이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Soli Deo Gloria!)이라는 기치 아래, 특유의 개혁주의 신학을 형성한 전통의 연장선상에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옥한흠목사님, 진리의 말씀과 적용으로 청중을 변화로 이끌고 가라.
1. 좋은 예화는 청중을 본문과 연결시키는 창이다. 좋은 적용은 청중의 삶을 어루만지고 변화를 이끌어내는 힘이 있다. 옥한흠 목사의 설교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그들로 하여금 삶을 바꾸게 만드는 비결은 예화와 적용이 균형 있게 제시되는 데 있다. 성경을 주석할 수 있는 설교자는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옥 목사처럼 본문에 적절한 예화와 삶의 뿌리를 내리는 적용을 통해 변화를 체험하게 하는 설교자는 드물다. 2. 옥한흠 목사의 설교에 대한 평가 중 상당수의 사람들이 그의 설교가 어렵다는 말을 한다. 때때로 무겁게 들리기도 한다. 본문을 분석해 나가는 그의 설교는 여간 집중하지 않으면 놓치기 일쑤다. 조금도 주저함도 없이 죄와 심판에 대해 전하는 그의 설교는 때로 무겁게 들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설교가 청중의 가슴에 파고드는 비결은 본문에 알맞은 생생한 예화에 있기 때문이다. 3. 옥 목사의 설교에는 예화가 평균 5-6개씩 들어간다. 그가 사용하는 예화는 실제적이고 공감대를 형성하게 한다. C. S. 루이스의 글을 인용하는가 하면, 사랑의교회 성도들의 이야기가 등장하기도 한다. 자신의 삶에서 경험한 이야기는 성도들로 하여금 목사도 자신과 별반 다름없는 사람이라는 동질감을 형성케 하면서 은혜 받는 도구가 된다. 그리고 그가 인용하는 예화는 무엇보다 본문의 의도를 확연하게 드러나게 해 준다는 데 강점이 있다. 4. 옥 목사의 설교를 듣노라면 그가 예화 수집에 얼마나 민감하게 촉수를 펼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신문 칼럼, 전문가의 견해, 문학과 고전, 소설, 최신 경영학 이론, 의학 상식, 미래학과 최신 과학 경향, 시사 내용뿐 아니라 다양한 책의 내용 및 통계 자료, 외국서적, 여론조사 등 매우 다양하다. 예화 인용도 매우 다양하다. 명언, 은유, 비유, 속담, 우화, 전문가의 견해 등도 곁들여진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얼마나 설교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며 고민하고 있는지를 알게 한다. 5. 그에게 예화는 설교를 흥미롭게 만드는 하나의 이야깃거리가 아니다. 쉬운 설교를 위해 지나친 친절을 베푸는 설교자의 노력도 아니다. 본문을 가장 잘 이해시키고 피부로 느끼게 하려는 목자의 심정을 보여준다. 6. 어떤 설교자들은 본문의 의미에 지나치게 치중한 나머지,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대하며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놓쳐버린다. 본문을 읽기만 하고, 본문과 무관하게 어떻게 살 것인지의 삶의 윤리만 강연하는 설교도 있다. 그러나 옥 목사의 적용은, 본문의 이해와 청중의 삶에 뿌리 내리는 적용이 균형 있게 나타난다. 7. 최근의 설교학 경향은 적용과 촉구를 하지 말 것을 강조한다. 청중에게 무엇을 촉구하는 것은 설교를 일방적으로 만들고, 청중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냥 말씀을 듣기만 할 뿐, 결론과 적용은 청중이 알아서 내리도록 열어두라고 조언한다. 8. 옥 목사는 이런 주장을 완강하게 거부한다. 그는 기독교 설교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아는 설교자다. 설교가 단순히 본문만을 강해하여 성도들의 성경 지식을 고양시키는 게 아니다. 설교란, 진리의 말씀을 통해 청중의 변화로 나아가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옥 목사는 이런 설교 원리에 매우 충실한 설교자다. 9. 그렇다면, 옥 목사는 설교에서 어떤 내용을 적용하고 있을까? 불신자에게는 과감하게 구원을 향한 결단을 촉구하고, 믿는 자에게는 거룩한 삶을 향하도록 강력하게 촉구한다. 신앙의 유무에 상관없이, 그의 설교를 듣는 청중으로 하여금 하나님 말씀대로 살 것을 강력하게 도전한다. 10. 특히, 신자를 향한 촉구는 그리스도를 통한 인격의 변화가 개인의 삶의 차원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일침을 가한다. 부패한 정치계와 경제계, 나아가 사회의 구석구석에 ‘빛과 소금’으로 존재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사명에 대한 촉구로 이어진다. 이 사명이 닿아야 하는 범주는, 지구적 생태의 회복을 포함하는 피조 세계 전체를 포함한다. 11. 그의 질책은 차라리 절규에 가깝다. 그는 설교에서 이 땅에서의 삶에서 성도들로 하여금 말씀의 구체적인 적용을 촉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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