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분명히 예전과는 다른 시대에 살고 있다. 설교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사실 역시 우리 세대의 특징이다. 만약 우리가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듯이 행동한다면 집단 망상에 빠져 이것이야말로 더 큰 위기를 불러올 것이다. 당신은 시간이 흐르면 사람들이 강해 설교를 더 들으려고 할 것이라 생각하는가? 아니면 그 반대가 될 것이라 생각하는가? 교계의 흐름과 출판업계의 흐름과 매출을 보면 그렇게 긍정적인 결과를 낙관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전반적으로 강해 설교를 더 들으려고 하거나 듣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강해 설교의 측면에서 볼 때 복음주의 교회는 대대적인 군축을 강행해 버린 듯한 느낌이다. 성경 강해가 쉬운 임무가 아님은 잘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성경 강해가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다. 도리어 성경 강해는 복잡하지 않고 이해하기 쉽다. 성경 강해란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 또는 번역하여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느헤미야 8:8) 하는 것이다. 이 말씀이 잘못 이해할 만큼 어려운 것인가? 잘못 이해할 만한 내용이 있는가? 설교자가 받은 임무는 아주 간단하다. 성경을 읽고 설명하는 것이다.
성경을 강해하는 사람은 성경을 읽고 성경을 설명하라는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강해란 본문을 읽고, 해석하고, 집에 가고, 다시 돌아와서 본문을 읽고, 해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강해 설교에 대한 지침이기도 하다. 물론 설교하는 행위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많기는 하다. 성경은 말씀을 전하는 자는 반드시 먼저 부르심을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올라왔으니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로서 그의 하나님의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음으로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자이더니”(에스라 7:6)
하나님이 아무나 지명하셔서 이러한 지침을 내리시고 그 명령에 순종하라고 하시는 것은 아니다. 설교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몇몇 사람에게만 주님의 손이 임하신다. 따라서 설교자는 소명이 굉장히 중요하고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누가 이 일에 부르심을 받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에스라 7:10이 우리에게 좋은 힌트를 준다. 에스라는 설교를 위한 적임자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데 이는 그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사명과 더불어 연구하는 자세도 설교자임을 증명하는 중요한 요소라는 것이다. 설교자란 하나님이 부르셨고, 회중이 그 사람 위에 주님의 손이 임했음을 인정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 사명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능숙해지기 위해 성경 연구에 전념하고 준비하는 모습으로 반응한다.
신약성경도 이러한 지침을 준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마지막 편지를 쓰며 목회자의 소명 중 가장 우선해야 할 것에 대해 부탁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이다.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알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디모데후서 4:1~2)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얼마나 똑똑해야 하는가? 얼마나 많은 학위가 필요한가? 바울은 이 말씀에서 뜻이 분명한 단어만을 사용했고, 구절을 복잡하게 쓰지도 않았다. 그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하고, 경책하며, 경계하고, 권하고, 인내하며 가르치라는 명령일 뿐이다. 이것이 강해 설교의 틀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왜 이런 설교가 나오지 않는가? 왜 성경 강해가 많은 교회에서 사라지고 있는가? 왜 성경 강해가 많은 설교단에서 자취를 감추고 있는가? 왜 성경 강해는 많은 설교자에게 낯선 것이 되어야 하는가? 왜 강해 설교는 신학교 졸업 후에 또 다시 배워야 하는 장르가 되었는가? 어쩌면 우리는“강해는 곧 설교이다”라는 사실을 잊고 있기 때문일 수 있다. 성경대로 하자면, 강해가 아니면 설교가 아니다.
어쩌면 강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설교라 부르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람들은 당신을 설교자라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본문을 읽지도 않고, 설명하지도 않고, 경책하지도 않고, 경계하지도 않고, 권하지도 않고, 인내하며 가르치지 않는다면 당신은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강해 설교를 선호하는 편이야!”라는 말을 멈추고, “나는 설교자이다, 나는 본문을 읽고, 설명하고, 연구한다. 그리고 계속 그렇게 반복할 것이다”라고 말하자. 설교자와 설교 강단의 회복은 정말 간단한데 비극적일 정도로 이것이 결여되어 있다.
- 위의 글은 알버트 몰러(미국 남침례 신학교 총장)가
‘셰퍼드 컨퍼런스 2008”에서 한 강의 일부를 발췌 수정 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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