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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를 불쌍히 여기는 가?(시편103:13-18) 옥한흠 목사 설교

by 꿈꾸는 나무의자 2018. 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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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를 사는 우리 부모들이 당면하고 있는 가장 어려운 문제중의 하나가 자녀교육이 아닌가 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동교육에 전혀 경험이 없는 성인들에게 어린 생명을 맡기셨다. 자격을 얻어서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는 없다. 모르는 중에 키워가면서 배우게 되는 것이다. "좋은 부모가 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 불가능한 일이다"라고 한 어느 분의 글에 수긍이 간다. 
세계적인 상담학자로 알려져 있는 게리 콜린스도 자기가 키우는 십대 딸들을 두고 십대 청소년들을 이해한다는 것은 아주 불가능하다고까지 표현한 일이 있다. 하나님의 도움을 청하는 겸손한 태도를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우리는 자녀를 어떻게 키워야 하는가?
오늘은 그 방법적인 면보다 부모가 지녀야 할 마음가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13절에 있는 "불쌍히 여긴다"의 의미가 무엇인가? 이것은 적극적인 이해의 감정을 말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편에 서서 우리의 연약성과 유한성을 이해하려고 하신 하나님의 마음이 바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예수님이 인간이 되어 오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는 우리의 연약성과 유한성을 깊이 이해하고 계신다(14절).
이와 같이 하나님 아버지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적극적인 이해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면 부모 된 우리도 자녀를 이해하기 위해 꼭 같은 원리를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대는 변화와 복잡이 그 도를 넘어 버린 문명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현사회 속에 살고 있는 아이들이야말로 세계문화사 중에서 가장 약함을 절감하는 세대가 아닌가 생각한다. 이들은 어떤 절대적인 가치관을 고집하기에는 자신들이 너무나 약하다는 것을 느낀다. 우리는 이들을 이해해야 한다. 현대 문명의 물결 속에 떠밀려 가고 있는 자녀들의 형편에서 그들을 이해하려는 진지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적으로 자녀들이 직면해 있는 위기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성경을 보라. 말세가 되면 영적으로 얼마나 암담한 상황이 된다고 하였는가? 문명의 위기는 신앙의 위기를 의미한다. 도덕적 위기는 영적인 위기를 수반한다. 그러므로 이해해야 할쪽은 우리들이다. 자녀들이 우리를 이해하려다가는 오히려 낙오자가 될 지 모른다. 우리 부모가 그들의 입장에서 가정과 세상을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을 좀 더 적극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이해하실 때 사용하신 몇 가지 원리를 따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첫째, 사랑의 바탕을 가진 이해를 해야 한다. 예수님은 자기를 만난 자이면 예외 없이 자기는 사랑을 받고 있다는 강한 감정을 느끼게 했다. 그런데, 크레이그 매시가 2,200명의 청소년을 대상으로 조사한 최근의 보고에 의하면 79%가 사랑의 결핍을 호소하고 있다. 우리는 은근한 말에서 혹은 무언의 행동에서 자녀가 '정말 나는 사랑을 받고 있구나' 하는 감정을 느끼게 해야 한다. 이럴 때 자녀에게 필요한 교육을 할 수 있는 바탕이 닦여지는 것이다. 
둘째, 모범의 표준을 가진 이해를 해야 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연약해서 잘 행하지 못하는 것을 자신이 모범을 보임으로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선생님이라는 오해를 불러 일으키지 아니하였다. 
모범이란 내가 이해하려는 사람의 입장에서 내가 먼저 최선의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신뢰를 심어 주는 길이 된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언행의 모범이 되고 있는 환경이라면 그들은 우리가 설혹 이해를 못해 주는 것이 있어도 문제로 삼지 아니할 것이다. 부모가 몰라서 그렇다는 비난은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번째, 자유로운 의사소통의 환경을 가진 이해를 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의사소통부터 먼저 해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아시고 항상 기도하라고 하셨다. 말이 막히지 아니하는 가정의 환경을 만드는데 성공한 부모라면 자녀교육에 그다지 어려움을 느끼지 아니할 것이다. 가정에서 의사소통이 잘 되려면 부부가 먼저 좋은 대화의 모범을 보여야 아이들도 자기들의 의견, 불평, 경험 등을 쉽게 털어 놓을 수 있다.
마지막, 훈육을 통한 이해를 해야 한다. 이것은 실제적인 가르침이며 지도를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해하시되 방임한 상태로 놓아 두시지 않는다. 성경을 가지고 교훈 하시고 책망하시고 시정해 주시고 성장시켜 주신다. 훈육은 모든 이해의 최종단계다. 바른 이해를 하였기 때문께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곧 훈육이다. 구체적인 훈육을 못한다면 아직 이해를 못하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사랑의 바탕, 모범의 표준, 자유로운 의사소통의 환경, 구체적인 훈육을 가지고 우리 자녀들을 적극적으로 이해하고 있는가? 이것이 오늘 우리 모두의 질문이 되어야 할 것이다.

<본 말씀은 옥한흠 목사의 주일설교(1985.5.5)를 요약, 정리한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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