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전쟁 (딘 셔만 지음)
제1장 생사를 건 투쟁
1970년, 나는 파푸아뉴기니의 포트 모레스비에 위치한 숙소의 마룻바닥에 누워 있었다. 어떤 응답을 받아야 했으므로 7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하고 있었다. 우리 예수전도단 팀은 그곳에서 3개월 동안 머물면서 말씀을 증거하며 집회를 가졌지만 아무런 열매도 얻지 못했다. 그러던 중에 실제로 나를 괴롭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도시의 교회들은 거듭났다고 말하는 사람들로 차고 넘쳤지만 죄의 사슬에 묶여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소위 크리스천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주술을 행하고 있었다. 우리가 그것을 대적하여 설교했지만 변화는커녕 강퍅함만이 더해질 뿐이었다. 무언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되었다. 나는 하나님께 응답을 구하며 금식하면서 기도하기 시작했다.
거친 마루 위에 누워 기도하고 있던 어느 날, 하나님의 음성이 마음속에 들려왔다. 그분의 응답은 예기치 못했던, 전혀 새로운 말씀이었다. 그렇지만 그 말씀은 이제까지 들었던 여느 말씀처럼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 도시를 지배해온 어둠의 세력을 이기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찬양이다. 이 어둠의 세력들은 지금까지 한번도 도전을 받아본 적이 없다.” 나는 어안이 벙벙하여 그냥 누워 있었다. 나는 그곳을 지배하는 영적 세력에 대하여 한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뉴기니의 교회는 훌륭하게 세워져 있었는데, 어느 정도 성장한 교회들이었다. 선교사들은 여러 해에 걸쳐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웠다. 그들의 교리는 올바른 것이었으며, 그들은 성경적인 신앙생활을 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파푸아뉴기니를 지배하는 영적 세력들이 한번도 도전을 받지 않았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가 어둠의 세력들에게 정면으로 도전하지 않고도 어느 정도는 성공적인 교회가 될 수 있다는 말이 아닌가!
로켓 과학자라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이해하는 데 마음을 쏟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정열적으로 ‘찬양하는 사람들’이 되어 하나님 말씀을 실천에 옮겼다. 때때로 우리는 자그마한 선교 본부에서 아침 내내 하나님을 찬양했는데, 방을 빙글빙글 돌면서 소리 높여 큰소리로 찬양하는가 하면, 무릎을 꿇거나 일어서서 찬양하기도 하고 고개 숙여 경배하며 찬양하기도 했다. 마침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사람들이 구원을 얻고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며 성령충만을 받는 등 놀라운 일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복음을 전하러 나갔을 때 변화는 뚜렷하게 나타났다. 마음이 굳어져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 대신,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자신들이 행한 주술을 고백하는 사람들을 보게 되었다. 회개의 눈물이 차고 넘쳐 급기야 우리 집회에는 5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참석하게 되었다. 우리는 매주 바닷가에서 주님을 영접한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는데, 이것은 3년이나 계속되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고 눈먼 자가 눈을 뜨게 되었다. 우리는 성령충만한 결신자 중 아홉 명의 동역자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곧 영적 전쟁의 무시무시한 현장을 실제로 보게 되었다. 사탄의 공격은 갑작스럽고 포악스러운 것이었다. 20대 초반의 뉴질랜드 청년 데이빗 윌리스가 몇몇 젊은이들과 함께 시내에서 떨어진 부락으로 전도를 갔다가 그곳에서 무당들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혔는데 떠나기를 거부하자 무당들은 그들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얼마 후 데이빗은 뇌성말라리아에 감염되어 살아날 가망이 거의 없게 되었고 설사 살아난다 해도 뇌가 손상되어 식물인간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우리 팀은 온 힘을 다해 철야 금식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마치 지옥의 모든 세력들이 우리에게 총공격을 가하는 것 같았고, 데이빗의 몸을 단단히 옭아매는 것 같았다. 뉴질랜드에 있는 데이빗의 아버지가 급히 달려왔다. 나는 함께 있는 팀원들을 모두 모아놓고 결사적이면서도 나직한 목소리로 하나님께 호소했다. 그때 나는 어떤 충동을 느껴 침상 옆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데이빗의 귀에 대고 외쳤다. “너 죽음의 악한 세력아! 예수님의 이름으로 꾸짖는다. 이 사람의 몸에서 물러나라.” 그러자 데이빗의 입에서 꾸르륵거리는 소리가 크게 들렸는데, 그것이 전부였다. 본부로 돌아온 우리는 모두 기도하며 온 밤을 지새웠다.
다음 날 아침 중환자실을 찾아가자 데이빗의 아버지는 화가 나서 나를 두고 나가 버렸다. 나는 침상으로 걸어가면서 데이빗의 무표정한 시선이 따라오고 있음을 느꼈다. 나는 “데이빗, 우리는 너를 위해 기도했는데, 예수님께서 승리하셨어!”라고 말했다. 그러자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내 자신이 보고 듣지 않았더라면 믿기 어려웠을 것이다. 입을 움직이지도 않고 그저 멍한 시선으로 있던 그의 목에서 “할렐루야”라는 말이 흘러 나왔다. 확실히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 것이다. 다음 날 중환자실에서 일반병실로 옮겨진 그는 극도로 쇠약하긴 했으나 분별 있게 말했고 약간의 도움을 받아 걷고 있었다. 나는 너무도 기뻐 펄쩍펄쩍 뛰면서 병원 전체가 들을 수 있을 만큼 큰 목소리로 “주님을 찬양합니다”하고 외쳤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승리를 주셨다!
이것은 20여 년 전 일이다. 그때 이후 데이빗은 남부 인도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있다. 우리의 결사적인 기도와 금식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7만 5천 영혼들이 살고 있는 포트 모레스비가 변화하는데 일익을 담당하게 하셨다. 우리는 하마터면 한 생명을 잃을 뻔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승리를 주셨고 이를 계기로 나의 관심이 영적 전쟁에 맞춰지게 하셨고, 이것이 나의 탐구의 시작이 되었다.
제2장 가장 큰 모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의의 싸움에 참여시키기로 작정하셨다.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는 하나님의 나라를 훼방하거나 더럽히는 것들을 적극적으로 격파시키고 어둠의 세력들을 몰아내는 것이다. 우리는 가장 거대한 싸움, 가장 위대한 모험에 참여할 수 있다. 우리는 선이 악을 이기는 것과 갇힌 자들이 해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책의 줄거리나 영화의 주제가 아니다. 이것은 정확히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계획하시는 일이다. 우리가 어떻게 영적 전쟁에 참여하는가를 배울 때 비로소 이것은 실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이 싸움에 휩싸이게 된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이 영적 전쟁 속에 있다. 우리는 이를 모면하거나 중립적인 입장에 서지 못한다. 물론 나는 모든 고통스런 상황이나 사람들의 성격적인 결함을 마귀의 탓으로 돌리는 그런 마귀 사냥꾼이 아니다. 내가 영적 전쟁에 대해 가르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이 주제가 오늘날 세계를 복음화하려는 노력 가운데 간과되고 있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나의 상담 경험으로부터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십자가 위에서 거두신 승리를 이미 패배한 원수들이 그냥 빼앗아가도록 내버려두는 경향이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 이유는 하나님께서 역사를 통해 영적 전쟁을 강조하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가 영적 전쟁을 통해 사악한 세력을 짓밟고 승리를 거둠으로써 영혼들을 얻고 사회를 변화시키며 역사를 바꾸고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데 이바지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군대가 되기를 원하신다.
영적 전쟁은 개성이나 은사, 소명, 배경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했을 때, 우리는 자동적으로 전쟁에 돌입한 것이다. 영적 전쟁은 우리가 이미 전쟁의 한가운데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으로 시작된다. 우리가 마귀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고 해서 마귀가 떠나가는 것은 아니다. 영적 전쟁에 있어서 무지는 상책이 아니다. 마귀는 어둠 속에서 활동하므로 우리가 마귀에 대해 무지할 때, 우리 또한 어둠 속에 있는 것이고 마귀는 마음대로 활약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마귀의 활동에 빛을 비추면 비출수록 마귀의 활동은 제약을 받는다.
한편 우리가 대적에 대해 알고자 한다면 우리는 먼저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 감동된다는 것은 동전의 또 다른 면이다. 그리고 이와 함께 우리가 알고 있어야 하는 또 다른 진리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사람들인가 하는 것이다. 사탄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의 지위를 모르는 사람들이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모르는 사람들을 획책한다. 우리가 권세 있는 자로서 행동하기 원한다면, 성경이 우리에 대해 말씀하시는 바를 알고 있어야 할 뿐 아니라 확실히 믿어야 한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대한 기본적 기초를 세 가지로 구분하여 놓았는데, 그것은 앉기, 걷기, 서기다. 우리는 전적인 쉼(앉기) 가운데서 구원을 확신하며, ‘부르신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함으로써(걷기) 비로소 대적 마귀 앞에 늘 맞설 수 있을 것이다(서기). 마치 곡예사의 곡예처럼 황당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는 동시에 서고, 앉고, 걸어야 한다. 그럴 때만이 우리는 전진하며 어둠의 세력을 무너뜨릴 태세를 갖추게 되는 것이다. “종말로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 안에서 강건하여지고”, 이 상태로 영적 전쟁에 임해야 한다.
제3장 적을 아는 것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12). 대부분의 스포츠와는 달리 씨름은 조금이라도 쉬거나 숨돌릴 틈을 주지 않는다. 끊임없는 집중을 요구하며, 모든 생각을 모으고 모든 근육을 긴장시키고 있어야 한다. 우리들의 삶 속에서도 매순간 이 씨름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혹은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 사탄은 훨씬 더 잔학하다. 우리는 우리 대적의 정체를 폭로해야만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 그리고 사랑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를 필요로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탄의 악함과 파괴적인 힘에 대한 진상도 자세히 알아야만 한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마귀는 우리의 건강과 생명을 빼앗으려 한다. 그는 우리의 생산력, 우리의 인간관계, 우리의 기쁨, 우리의 평화, 그리고 우리의 믿음을 빼앗고자 한다. 자살은 사탄의 역사다. 우리를 파멸시키려는 것은 마귀의 본성이다. 또한 마귀는 완만한 형식의 자살, 곧 삶으로부터 자기 파괴적인 도피로 향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 명백한 형태가 마약과 알코올이다. 또한 음식, 섹스, 텔레비전, 혹은 쇼핑에 대한 중독 등은 전혀 무해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우리가 만일 삶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현실을 외면하는 무언가를 사용하고 있다면 그것은 자살이며 죽음이다. 사탄은 또한 죄로 우리를 파멸시키려고 한다. 그러므로 죄에 가담하는 것은 어둠의 세력이 우리의 삶에서 활동하도록 허용하는 것이며, 우리의 삶을 황폐케 하려는 사탄의 목적을 이루는 데 협력자가 되는 것이다.
파멸로 이끄는 사탄의 미끼는 매우 매혹적이고 그만큼 기만적이다. 그의 계획은 정교하며 모든 살아 있는 존재에까지 미친다. 그것들은 때때로 숨겨지는가 하면, 어떤 시대에는 뉴에이지 운동에서와 같이 노골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지난 20년간 점술의 확산과 그 전파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일어났으며, 다양한 방식으로 확산되어 우리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어떤 초자연적인 정보나 활동도 하나님이 아니면 사탄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령을 통해서 온다. 그 밖에 다른 것들은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것들이다. 그 이유는 사탄의 일은 선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멸망과 속박으로 이끄는 것이기 때문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를 인도하시기를 원하신다. 예수님은 “나의 양은 나의 음성을 듣는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께 나아가면 된다. 때로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때라도, 심지어 얼마 동안 그분의 음성을 듣는 데 어려움을 겪을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그분의 성품을 신뢰할 수 있다. 그분은 신실하시고, 공의로우시다.
그리스도인으로 성숙된다는 것은 우리의 기복을 다루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우리가 취약할 때 적이 자주 공격한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을 격려하는 법과 서로를 격려하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 민감한 상태로 있어야 한다. 우리 모두는 끊임없이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동시에 적들이 활동하는 것 또한 의식할 수 있다. 단지 레이더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적의 공격 계획을 좌절시킬 때가 자주 있다. 마귀가 우리의 레이더 화면에 포착되면, 우리 안에 갑자기 빨간 불이 켜지고 사이렌이 울려서 공격 태세를 갖추게 하고, 또 대개의 경우 공격 자체를 완전히 피할 수 있게 된다.
제4장 세 가지 싸움터
우리 삶에는 공격에 대항하여 강화되어야만 할 세 가지 전략적 요충지가 있다. 그것은 생각과 마음과 입술이다. 우리는 호흡이 다할 때까지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한다. 마귀는 무소부재하지 않다. 하나님께서 마귀를 대적하라고 말씀하실 때, 그 말씀은 루시퍼에 속한 영적 존재들을 대적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생각된다. 나는 이 책에서 어떤 한 존재 혹은 그의 타락한 무리들 모두를 가리키는 포괄적인 의미로 사탄이라는 말을 쓸 것이다.
대부분의 영적 전쟁은 인간의 생각 속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옳지 않은 생각이 떠오를 때나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따르지 않은 때가 언제인지 깨닫는 것도 포함된다. 적은 사람들을 신뢰하지 못하게 하고 인간관계를 파괴시킨다. 그리고 우리의 상상력에 계속해서 거짓된 것과 바르지 못한 것을 주입시켜 두려움과 공포를 조장한다. 18명을 살해한 살인광 테드 번디는 그가 읽은 모든 폭력, 음란물에서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았는지 털어놓았다. 마귀의 견고한 진들은 잘못된 생각, 즉 불신, 낙담, 두려움, 열등감과 죄책감 등의 부정적인 생각을 통해 우리들의 생각 속에 지어진 공중 누각들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모든 생각들에 대해 경계를 서는 것, 이것이 영적 전쟁이다.
두 번째 전략적인 싸움터는 마음이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마음’에 대해 언급할 때 나는 두 가지 성경적 의미를 취하는데 그것은 태도와 감정이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잘못된 태도들이 자리 잡도록 내버려두며 그것들을 점검하지 않은 채 드러낸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삶을 운영하고 결정을 내리고 잘못된 태도들을 고쳐야 하는 매일의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고 분명히 말한다.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는다는 것은 우리의 태도를 다스리는 매일의 책임을 감당한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잘못된 태도들을 드러내 보이시면 우리는 그것들을 신속하고도 철저하게 다스려야 한다.
한편, 잘못된 태도를 다스리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부정적인 감정을 다스리는 것이다. 감정은 잘못된 것이 아니나 마귀는 감정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베드로전서는 우리에게 감정과 태도를 다스리는 비결을 제공한다. 첫 번째 명령은 우리 자신을 낮추라는 것이다. 두 번째 명령은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다. 염려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도와 우리를 돌보시는 그분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이다. 사탄이 하는 모든 일들, 어둠의 왕국과 그의 본성은 교만과 불신, 두려움으로부터 비롯되므로, 이런 것들을 삶에 용납해서는 안 된다. “근신하고 깨어 있으라”고 말하는 이유는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능력으로 인해 우리는 근신하면서 미소지을 수 있다. 어떤 굴레도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보다 더 크지 못하다.
인본주의 철학은 ‘좋으면 하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자기중심적인 반신적, 반기독교적 명제다. 우리의 감정이나 무엇을 느낀다는 것 속에는 선택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는가 하는 것은 우리의 느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느끼는 것에 상관없이 진리에 순종해야 한다. 심지어 우리가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을 때도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한다. 그분은 우리를 실망시키는 법이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감정에 “아니오”라고 말해야 하고 하나님께는 “예”라고 말해야 한다. 이것이 영적인 성숙함이다. 우리 속에 있는 결심을 목도하는 한 마귀는 편치 못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얼마나 자주 우리의 입을 마귀의 손아귀에 내어줌으로써 파괴의 도구가 되도록 내버려두고 있는가?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잠 18:21). 우리의 입을 지키는 것이 중대한 일이라는 것은 욥의 이야기에서 나타난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괴로움을 겪는 가운데서 욥이 잠잠히 있었던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입술로 죄를 범하지 않았다는 것은 놀라운 진술이다. 그는 어떤 선을 넘어가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말해서는 안될 것을 말하려고 할 때 우리의 입술을 그저 굳게 다무는 규율이 필요하다.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마 15:18). 만일 우리가 우리의 생각, 마음, 그리고 입을 지속적으로 지킬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에 마귀가 접근하는 것을 거부하게 될 것이고 진정한 승리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제5장 영적으로 강하게 되는 방법
영적 전쟁은 높은 수준의 영적인 강함을 필요로 한다.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엡 6:10). 만약 우리가 강해질 수 있다는 것을 모른다면 우리는 계속 패배 속에서 살아갈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비극인지…. 우리는 강하다. 이것은 자랑이 아니며, 자존심도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리와 일치하는 겸손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강하다.
운동선수들은 조깅이나 훈련, 체중 감량을 통해 자신의 육체를 조절하고 힘을 유지한다. 영적 전쟁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그 힘을 유지해야 한다. 그러려면 첫째로, 하나님께 이야기하고 듣는 습관이 들어야 한다. 기도는 살아 계신 하나님과 나누는 친밀한 대화며 우리를 강하게 하는 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현존에 들어가 그분과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며, 그분이 관심을 갖고 들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반드시 동일하게 그분으로부터 들으려고 해야 한다. 강함은 그분의 현존하심으로부터 온다.
두 번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야 한다. 단순히 성경 구절을 읽는 것은 우리의 삶에 진정한 의미를 부여하지 못한다. 우리가 들었던 수많은 설교와 성경 구절들 가운데 어느 것이 우리의 삶에 차이를 가져왔다면, 그것은 오로지 우리가 시간을 들여 오랫동안 숙고하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탐구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강하게 되기 위해 해야 할 또 하나의 일은 교제다. 교제는 개방성과 솔직함과 함께 시작된다. 겸비함으로 서로 관계를 맺는 것은 우리를 강하게 한다.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히 3:13). 우리는 일상의 기초에서 더 큰 믿음과 사랑과 순종을 위해 서로 관계를 맺고, 관심을 갖고, 격려해 줄 필요가 있다. 이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본질적인 부분으로서 서로에 대한 헌신과 다른 사람의 부요함을 기꺼이 고려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영적 조절의 또 다른 수단은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 즉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고전 14:4). 성경은,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은 내적 존재를 세우고 강건하게 한다고 말한다. 또한 우리는 경배드릴 때 강하게 된다. 참된 경배는 정결한 양심을 갖고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진정한 접촉이다.
씨름에 적용되며 또한 우리의 영적 전투에서도 적용되는 또 다른 것은 우리가 붙잡는 것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역대하 20장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말씀은 “내일 너희는 마주 내려가라”는 말씀과 연결된다. 하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어둠의 세력들과 싸우실 때 수동적으로 텔레비전이나 보며 우리의 삶을 보내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마귀들과 싸울 책임이 있다. 우리가 붙잡는 법을 안다면 그것은 큰짐이 아니라 그 안에서 우리가 평안할 수 있는 일상적인 훈련인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히브리서 5장 14절은 장성한 자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고 말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만난다면 우리는 붙잡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를 대적하는 원수의 음모를 인식하게 될 것이며, 그들을 대적할 수 있고, 영적 전쟁은 매일 몸을 씻는 것처럼 편안한 일상의 일이 될 것이다.
전쟁은 혈과 육에 관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 점을 잊기가 쉽다. 수세기 동안 그리스도의 교회는 영적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지시, 즉 혈과 육에 대해 싸우지 말 것을 따르는 데 실패해왔다. 사람들은 사탄과 싸우는 것은 꺼려할지도 모르지만, 사람들과 싸우는 데는 모두 능숙하다. 패배한 마귀가 이른바 승리한 교회를 끊임없이 치는 것은 우리가 항상 서로 싸우기 때문이다. 마귀는 틀림없이 자신이 오직 승리자라며 비웃을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바른 교리를 가졌다 할지라도, 만일 우리가 그것을 방어하느라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면, 그것은 원수들이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는 것이다. 쟁점을 놓고 싸우는 것은 괜찮으나 쟁점 뒤에 있는 사람과 싸우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이런 사람들은 쟁점이 아무리 옳은 것이라 해도 결코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지 못한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데 헌신적이었으며 성경을 믿는 자들이었지만, 그들의 의로움을 너무나 자랑했기에 성육신하신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과, 우리의 기도에 대한 그분의 반응에 의해 그리고 성령의 이끄시는 활동을 통해 나아간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5가지가 있다. 첫째, 행하기 전에 기도해야 한다. 둘째, 원수에게 저항하고 그에 대해 권위를 가져야 한다. 셋째, 비난을 들었을 때 혈과 육의 싸움을 하기보다 정직하게 그것이 진리인지를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넷째, 우리는 결코 믿음을 잃거나 죄책감에 빠져서는 안 된다. 다섯째, 우리는 어떤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비판하고 분노하고 논쟁할 능력을 주신 것은 우리가 기도하면서 우리의 분노를 누그러뜨리고 원수들을 대적하면서 죄와 마귀에 대해 분노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자존심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분노를 돌릴 때 그 분노는 죄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기억하자. 하나님은 분노하시지만 죄를 짓지는 않으신다. 그분은 적절한 이유에서 분노하시고 적절한 방법으로 분노를 사용하신다. 만약 우리들 각자가 살아 있는 동안 다른 사람들과 싸우지 않기로 결심한다면, 사탄은 두려움에 떨 것이다. 우리가 오랫동안 서로에게 행해 왔던 것을 그에게 행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싸움은 결코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다.
제6장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
보이지 않는 세계는 우리가 보는 세계만큼 실질적이다. 사실 그것은 더 영원하고 결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사도 베드로는 이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벧후 3:10-12). 그러므로 더 많은 시간과 정력이 보이지 않는 세계에 투자되어야 한다. 매일 우리들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중요한 질문을 하는 것이 좋다. “오늘 보이지 않는 세계에 영향을 주는 나의 태도, 행동, 말들은 무엇일까?”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보이지 않는 세계는 어떤 것일까?”
보이지 않는 영적 영역의 주된 거주자는 천사들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이 실재한다는 것을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 주위에는 천사들이 있다.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 저희를 건지시는도다”(시 34:7)라고 말할 때, 어떤 사람은 이것이 실재하는 것인지 혹은 하나님의 보호에 대한 다윗의 시적인 은유인지 물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 곳곳에서 천사가 하나님이 보내신,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를 대신하여 행동하는 삶의 실재인 것을 명확히 한다. 히브리서 1:14는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 즉 모든 그리스도인을 섬기느라 바쁘다.”고 했다.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시 91:11-12).
보이지 않는 영역에 대한 좀 더 깊은 깨달음은 많은 문제들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비관주의나 상황에 막혀서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우리는 결코 이러한 것들의 희생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매일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이 전쟁에서 우리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연합을 파악하는 것이다. 엘리사는 그런 영역에서 살았고 우리도 역시 그렇게 할 수 있다. 어려운 상황과 압도하는 다툼, 잔인한 적들과 마주칠 때 우리는 희생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성경이 천사들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은 그들이 가진 세 가지 역할을 지적한다. 첫째, 전사 천사의 역할은 싸우는 것이다. 둘째, 사자 천사의 역할은 전달하는 것이다. 셋째, 경배 천사의 역할은 경배하는 것이다. 경배 천사는 그리스도의 탄생을 노래했다. 성경에 경배하는 천사들의 천사장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은 없다. 그러나 사탄이 된 루시퍼가 천사장이었다는 강한 암시가 있다. 가브리엘과 미가엘처럼 루시퍼는 하나님 앞에 서 있었다. “너는 완전한 인이었고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웠도다… 너는 기름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임이여 내가 너를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겔 28:12, 14). 또한 그는 가브리엘과 미가엘과 같은 서열에 있었으며 왕자라고 불렸다(엡 2:2).
그런데 어느 날 루시퍼는 하늘과 하나님의 현존에서 내버려졌다. 그는 완전하고 절대적인 빛과 하나님의 지식을 거절했고 회개하는 데 이르도록 하는 모든 것을 거절했기 때문에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이다. 루시퍼는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하늘에서 내던져졌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루시퍼의 선택을 정말 슬퍼하셨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루시퍼는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천사)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사 14:13-14)고 말했다. 다른 말로 하면 루시퍼는 한 분이신 참 하나님과 똑같이 또 다른 신이 될 것이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루시퍼가 또 다른 신과 같다고 생각하는 현실을 볼 때,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과 사탄을 동양의 음과 양의 경우처럼 반대적인 것으로 놓는 것은 이교도의 세계관이다. 그들은 동등한 대응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나님이시며, 창조되지 않은 위대한 창조자다. 그리스도인의 우주관은 비교할 수 없는 지존하신 분을 묘사한다.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두 개의 반대되는 나라를 다스리는 두 존재에 대한 개념은 다른 동양 종교뿐만 아니라 힌두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선과 악의 세력은 서로를 반격하거나 균형을 맞추는 것이 아니다. 성경이 비록 사탄을 가리켜 “이 세상의 신”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단지 그 자신의 거짓된 체제에 대한 권세의 위치를 표시하는 것이다. 천사들은 루시퍼를 하늘 바깥으로 내던졌고, 그는 어둠의 나라를 세우며 사탄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예수의 권세와 이름으로 그와 싸운다.
제7장 사탄의 조직과 전략
어둠의 왕국은 사탄과 귀신들로 되어 있으며 세상을 파괴시키는 사탄의 수법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소가 있다: 첫째 요소는 사탄의 조직으로서 이 조직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관찰하고 조종하기 위해 있는 것이다. 이 어둠의 왕국에는 정사와 권세와 능력이라고 하는 세 가지 기능이 있다. 둘째 요소는 어둠의 세력들로서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이라고 하는 성경상의 용어는 사탄의 왕국의 속성을 드러내는 말이다. 이 어둠의 세력들은 거짓을 말하고 진리를 혼미케 한다. 셋째 요소는 개인에 대한 공격으로서 악한 영들을 동원시켜 각 개인에게, 특히 개인의 생각과 마음에 침투한다. 악령들의 유혹은 죄를 부추기고 사람을 결박시킨다.
제8장 하나님의 주신 권세 사용하기
사탄의 세력의 규모와 치밀한 조직 때문에 우리는 위축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훨씬 더 강력한 군대를 조직하셨다. 그것은 바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군대로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또는 우리 자신에 대해 확신이 없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이 누구이며, 우리에게 주어진 권세가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머리로는 잘 알지만 사실상 내면 깊은 곳에서는 우리 자신의 영적 권위를 의심하기 때문에 권세 있는 자답게 행동하지 못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 우리 자신의 권위를 감정과 혼동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권세에 대해 확신 없이 행한다면 사탄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될 수 없다. 사탄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권위에 대해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그 믿음대로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사람을 만드셨을 때 동물들과는 다르게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하셨을 뿐만 아니라 다스리는 권세와 권위도 부여하셨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권위를 부여하실 당시, 사탄은 에덴동산에 뱀의 모습으로 있었다. 그 후에 마귀는 하와에게 접근했다. 사탄은 인간에게 부여하신 하나님의 권세를 노린 것이다. 사탄은 인간이 하나님께서 주신 권세를 잘못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인간이 불순종할 때 사탄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권세를 빼앗을 수 있었던 것이다. 사탄은 오늘날도 에덴동산에서 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권세를 찬탈하는 식의 똑같은 방법을 쓰고 있다. 사람이 죄를 짓기로 선택하고 하나님께 불순종해서 살기로 한 그만큼만 마귀는 세상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세상을 장악하고 있는 힘이다.
사람이 에덴동산에서 죄를 범한 뒤에 하나님께서는 이에 관여한 모든 자들을 꾸짖으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너(사탄)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 여기서 사탄의 후손이라는 것은 사탄이 자신의 것을 안에 심어놓은 사람들을 말하며 여자의 후손이란 하와에게서 태어난 모든 사람, 즉 전인류를 말한다. 이것이 영적 전쟁의 발단이다. 사탄은 이 심판의 언약에 머리를 곤두세웠을 것이다. 여자의 후손을 색출하기 위해 눈을 치켜뜨고 있었을 것이다. 가인과 아벨이 성장하자 사탄은 가인에게 접근했고, 그를 부추겨 아벨을 살해하도록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섭리를 막을 수는 없었다. 하와는 셋을 낳았고, 셋을 통해서 이스라엘 나라가 생겼으며 결국 예수님이 오신 것이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역사 전체를 포괄하는 대표적인 이야기다. 실제로 영적 전쟁이란 측면에서 보면 구약 성경은 두 가지로 축약될 수 있다. 첫째, 이스라엘을 통해 여자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등장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 기록이다. 둘째,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는 여자의 후손을 타락시키고 멸망시키려는 사탄의 역사다. 그래서 구약 성경에는 싸움이 많고 잔인한 것들이 많은 것이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전쟁들은 여자의 후손을 보존하여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이르게 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주목해야 한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거짓 신을 좇아 죄악을 범한 일이 많이 있었지만 그 가운데 진리 안에 보존된 남은 자들이 항상 있었다. 그리고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셨다.”
아마도 사탄은 이 여자의 후손을 타락시키기 위한 모든 노력을 쉬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후 광야로 시험받기 위해 들어가셨다. 사람의 모습으로 타락한 대천사인 루시퍼와 많은 마귀의 세력들 앞에 서셨다. 사탄은 자기 머리를 상하게 하리라고 되어 있는 여자의 후손을 타락시키기 위해 모든 힘을 총동원하여 유혹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예수님께서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그리고 이후 공생애 3년을 마치시고 때가 이르자 자진해서 악인들에게 자신을 넘겨주셨다. 증오와 반대의 표적이 되시고 잔학한 불의를 당하셨던 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동일한 고통을 당할 때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죄에 대한 용서와 씻음을 받은 것처럼, 비탄에 빠지고 참혹한 일을 당하는 중에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평화를 주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요한계시록 1장 18절은 말한다.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예수님께서는 음부에까지 내려가 사탄의 법적인 권리를 박탈하셨다. 이것이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야 했던 이유이다. 한 인간으로서 30년간 유혹을 이겨내시고 기꺼이 죽기까지 당신을 낮추신 것은 한 인간으로서 첫 사람이 넘겨준 것을 되찾아오기 위한 일이었던 것이다. 요한일서 3장 8절은 말씀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마귀의 일은 사람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는 것이요 모든 인간의 상황 안에 죄의 결과들이 나타나게 하는 것이다. 질병, 고통, 억압, 소외, 공포, 상한 마음, 병든 영혼, 전쟁, 기근, 증오 등 이 모든 것은 사탄이 우리 안에서 사람들을 통해 조장한 것들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모든 일을 멸하셨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마귀를 멸하심으로써 우리도 또한 동일한 일을 하도록 하셨다. 억눌리는 자, 탄압받는 자, 마음이 상한 자에게 다가가도록 하셨다.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에 마귀의 일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권한을 우리에게 주셨다. 이것은 대위임 명령에 잘 나타나 있다.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 즉 나으리라”(막 16:17-18). 이것이야말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마귀로부터 회수하신 권위를 잘 사용하는 충성된 청지기의 모습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계속해서 하시는 모든 역사가 능력 있게 나타나는 것은 우리가 참으로 어둠의 왕국에서 빛의 나라로 옮겨진 사람이라는 확신 속에서 이루어진다.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는 말씀에 의지하면 어떤 형편 속에서도 승리할 수 있다.
이제 법적으로 다시금 권세를 갖게 된 우리는 이 권위를 사용하는 5가지 방법을 알아야 한다. 첫째, 예수님의 능력 있고 보배로운 이름을 선포해야 한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해야 한다. 셋째, 원수의 권세를 깨뜨리기 위해서는 마땅히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해야 한다. 넷째, 사탄에게 예수님의 보혈을 상기시켜야 한다. 예수님의 보혈을 선포하는 것은 마귀를 제압하는 막강한 힘이 있는 것 같다. 다섯째, 우리 자신의 증거의 말을 해야 한다. 하나님의 성품과 그분의 위대하신 일을 선포하고, 언제나 열린 마음을 가지고 진리를 말하며 우리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부분, 즉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사람인지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예수님의 보혈로 씻음 받은 사람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제 나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나는 신부로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존귀한 사람이다.”
제9장 사랑의 하나님은 왜 악을 내버려 두시는가?
하나님께서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면 왜 이 세상에는 악이 존재하는 것일까?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훌륭한 영적 군사가 될 수 없다. 악이 왜 이곳에 존재하는지 모른다면 악을 대적할 수도 없고 악을 없애기 위해 믿음을 가지고 기도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악이 불가피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적 세계관이 아니라 운명론이다. 기독교는 만사를 다 하나님의 탓으로 돌리는 오류를 범하지 않고, 세상에 존재하는 악에 대한 의문에 해답을 가지고 있으며, 기도로 세상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믿는다.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 첫째 이유는 사람들이 선택했기 때문이다. 악을 하나님의 과오라고 한다면 회개라고 하는 것은 우스운 짓이 될 수밖에 없으며 악에 대한 심판이라는 것도 공정치 않을 것이다. 로마서 5장 12절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라고 말씀한다. 아담과 하와가 소위 ‘인류의 타락’ 혹은 ‘원죄’라고 부르는 잘못된 선택을 했고, 그 후로 우리는 모두 그들의 행실을 이어받고 각자 나름의 잘못된 선택을 함으로써 세상에 죄가 관영(貫盈)하게 되었다. 재앙이라는 것도 인간의 악한 행위의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악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보다도 자유 의지가 더 귀중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 악이 남아있도록 허용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과 더불어 친밀한 관계를 맺기 원하시는데 이와 같은 질적인 관계를 위해서는 자유 의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인간의 자유 의지를 제거함과 동시에 세상에 있는 모든 악이 사라질 수 있다고 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정하셨다. 악취가 나는 모든 악이 사라진 상태가 결코 당신의 자유 의지와 마음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사실상 우리는 인간의 고통에 대해 납득되지 않는 것들이 많다. 그리고 하나님과 그분의 무한하신 지혜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들이 많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아시지만 우리는 극히 제한된 지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때로 하나님의 성품을 의지하지 않고는 어떠한 일도 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지만, 동일하게 다른 중요한 요인들 때문에 그분의 전능하신 능력을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하셨다. 예전에 죄악으로 관영한 세상을 홍수로 쓸어버리신 일이 있었지만 이것도 하나님의 최종적인 해결책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악을 저지하시는 역사를 멈추신 일이 없으시다. 그러나 공의라는 하나님의 성품으로 친히 인간에게 주신 자유 의지를 넘지 않는 선에서였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전능하시며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시다. 또 지혜로우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지혜로 인간에게 한 길이 마련되었다. 그것은 순전히 인간의 자유 의지로 이 세상의 속박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서 하나님과 사귐을 갖는 그 길을 선택하는 것으로 곧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였다. 하나님과의 영원한 사귐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고통이란 것도 별 의미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의 마음과 영혼 속에 자유와 평화와 생명을 알 수 있도록 하셨다. 그것은 사람의 이기심이 미치는 결과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며 악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다. 사람은 잠시 동안 받는 고난과 영원한 생명을 누리든지, 아니면 영원한 고통과 죽음 속에서 지내든지 할 수 있다. 사람에게 이 선택권이 없다면 고통이란 것도 영원히 없어야 할 것이다.
한편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 또 다른 이유는, ‘인간의 성숙’을 위한 것이다. 악이 존재하는 것은 인간의 선택으로 인한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한 차원 더 높이고 악과 싸울 수 있는 사람으로 성숙시키기 위해 타락한 세상과 이 땅에 존재하는 악을 얼마든지 사용하신다. 우리 삶의 격전장으로 사용하시고, 갖가지 시련과 고난과 역경으로 사용하신다. 따라서 우리가 타락한 세상의 현실을 인정하는 만큼 또한 그것을 우리의 성숙의 기회로 삼기로 결정한다면 우리는 승리의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13).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는 말은 우리가 원하지 않는 상황이나 견디기 어려운 일, 절망 등을 온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환난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바로 그 환난 때문에”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 세상과 마귀가 몰아넣을 수 있는 모든 일들 가운데 서서 진심으로 기뻐하고 극복해나가며 인내하는 그리스도인, 이보다 더한 증인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이와 같은 일들을 우리에게 유익한 일로 바꾸고 우리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게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영적 전쟁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우리로 현실을 도피하지 않고 극복하게 하기 위해서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형평에 맞는 은혜를 내려주신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이것이 하나님의 목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관심하지 않으시다. 예수님처럼 강건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도록 우리를 세우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지 않으시는 순간이란 절대로 없다. 이것이 우리가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하는 이유다.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의 성품은 우리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날 것이다.
광야는 우리를 성숙시키기에 가장 좋은 장소다.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고, 우리를 시험하기 위한 곳이다. 우리가 광야를 지나갈 때 죄를 거절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어떠한 유혹이라도 견뎌낸다면 우리는 참으로 잘 닦여진 성품을 갖게 될 것이며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될 것이다. 사탄의 정죄는 두루뭉술하고 모호하기 때문에 아무런 결실도 주지 못하나 성령의 깨우치심은 구체적이고 즉각적이다. 어쩌다 시험에 빠졌다 해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되며 회개하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함으로써 극복해 나가야 한다. 원수 마귀가 우리를 광야 학교에서 빠져나오게 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
제10장 악에서 구하소서
많은 사람들은 유혹을 당했기 때문에 자기를 더럽다고 느끼고 엄청난 죄의식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유혹은 죄가 아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은 예수님께서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말씀한다. 유혹이 죄책감을 준다면 예수님도 죄책감을 가지셨을 것이다. 고린도전서 말씀에 우리가 유혹을 “당할 수 있다”고 한 것은 유혹이 우리 안에 있지 않고 바깥에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죄가 이제는 우리의 일부가 아니라는 말이다. 죄가 우리의 일부라고 믿는다면 마귀는 필시 우리에게 와서 죄를 자극시킬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귀의 거짓말을 믿지 말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말씀하시는 성경 말씀을 믿어야 한다.
죄라는 것은 단순히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죄의 이면에는 어떤 충동적인 힘이 있어 계속해서 죄를 짓도록 우리를 자극시키고 부추긴다. 우리가 만약 이를 부정한다면 우리는 그러한 충동을 다룰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 자기를 낮추며 마음을 열고 고백함으로써 유혹과 함께 충동적인 힘을 사그러뜨릴 수 있다. 그리고 기도를 통해 죄를 짓도록 충동질하는 힘을 꺾어버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승리의 순간까지 유혹을 물리칠 수 있다. 성경은 우리가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다고 명백히 선언하고 있다. 만일 이 말씀이 사실이 아니라면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케 하는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우리는 성령의 도움으로 날마다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으며, 예수님 안에서 성장하면 할수록 점점 더 죄는 사라지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정기적으로 이렇게 기도할 것을 가르치셨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감당할 시험밖에 허락하시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심각한 유혹에서도 우리에게 피할 길을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10). 사탄이 공격하는 이 5가지 방법에 맞서 이기려면 하나님을 더욱 더 의지하면서 영적 근육을 단련시키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하나님은 삶의 현실 속에서 모든 일에 강한 용사가 되도록 우리를 부르신다.
제11장 기도에는 정말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아주 심하게 죄악으로 오염되어 있다. 어떤 사람은 세상사를 무시하고 단지 즐거움을 주는 생각만 하며 은둔해버린다. 이런 사람들은 현실 세계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기 위해 생활 가운데 여러 가지 구실로 벽을 쌓는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죽음과 파멸을 잊기 위해서라도 많은 사람들이 이런 방식을 선택하고 살고 있다. 우울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주변에서 일어나는 나쁜 소식이나 뉴스를 들으려 하지 않고 음악과 예술에 파묻혀 지내며 만족과 희열을 구한다.
한편, 이와 정반대로 충동적인 분노에 못 이겨 투쟁의 대열에 뛰어들고 악에 대해 격렬하게 대항하며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들의 진리에 대한 입장은 고려하지도 않고 거대한 불의가 난무하는 것을 보고 격분한다. 분노와 원한을 가지고 처절한 절망 속에서 뭔가 어떤 일을 벌여야 한다고 굳게 결심한다. 인본주의를 포용하고 뉴에이지 운동, 막시즘 등 세계의 현 상황을 과격하게 투쟁으로 맞설 수 있는 것이라면 그 어떤 것이라도 다 받아들인다.
그리스도인들도 이와 같은 오도된 방식으로 행동을 취할 수 있다. 많은 선의의 그리스도인들이 인간의 환경을 개선시키고자 기부금을 내며 시간과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악과 싸우는 영적인 방법은 무시한다. 이들은 하나님의 마음에 관심을 기울이기보다 인간의 환경에 더 관심이 많다. 반대 시위에 참가하고 파업을 선동하며 계몽 활동을 펴기도 하지만 기도나 영적 전쟁이나 전도에는 거의, 아니 전혀 시간을 내지 않는다.
이러한 양극단 사이에 중간 지대가 존재한다. 우리는 두려움 속에서 뒤로 물러나 은둔하지도 않으며 과격한 투쟁 노선을 취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현실에 압도당하지 않고 세상에 있는 죄를 깨닫고 죄를 단절시킬 수 있는 참으로 효과적인 어떤 일을 할 수 있다. 우리야말로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는 용사로 훈련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곳에 남겨 두신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성숙한 기독교 정신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어 놓으신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어떠한 사람으로 존재하는지 앎으로써 시작된다. 이것이 바탕이 되는 것이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데 대한 우리의 임무가 무엇인지 파악하고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우리는 바로 이곳에서 싸운다. 곧, 우리는 성숙한 기독교 정신으로 진군할 것이다.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영적인 진리를 배우도록 하기 위해 이스라엘 역사를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약속된 땅을 위해 싸웠던 이스라엘의 경험을 통해 마귀를 공격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와 같이 우리의 약속의 땅은 완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마귀에게 하고자 하신 일을 이미 다 행하셨다. 이제 나머지가 우리에게 맡겨졌다. 우리는 어둠의 권세를 몰아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생활로 꾸준히 행한다면 싸움에 질 염려는 전혀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씀하시며 또 사용해야 하는 무기까지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딤전 2:1). 이처럼 우리는 기도와 간구와 감사와 하나님과 중보하는 대상 사이에 서는 중보기도를 통해 영적 전쟁에 임해야 한다. 그리고 중보자로서 우리의 또 하나의 임무는 마귀와 중보하는 대상 사이에 서 있는 것이다. 이것은 사탄이 지상에서 획책하는 모든 시도를 제어하는 것이다. 우리는 마귀의 공격을 무력화시킬 수 있으며 그의 궤계를 파하고 모든 영향력을 제거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9)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으로부터 원수 마귀를 끊어버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할 수 있다.
어둠의 권세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 중보기도하지 못하도록 자신의 문제에만 골몰하게 만든다. 그리고 두려움과 절망과 정욕과 물질주의에 속박되도록 한다. 그래서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되게 함으로써 자기만을 위해 기도하도록 놔둔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서 미미한 존재로밖에 생각되지 않는다면 이사야 59장 말씀을 한번 보라. 오늘날 우리 사회를 연상케 하는 불의와 부정과 죄악이 만연한 세상을 기술하면서 이사야는 하나님의 반응을 기록한다.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시고 그 공평이 없은 것을 기뻐 아니하시고 사람이 없음을 보시며 중재자 없음을 이상히 여기셨으므로”(사 59:15-16).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에 변할 수 없는 어떤 원칙을 정하셨다. 곧 우리가 기도하는 것에 따라 인간사에 역사하시기로 결정하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중보자를 찾으시는 이유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뜻대로 기도하기를 원하신다.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까지도 우리에게 알려주신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할 때 직접 움직이시며 역사하신다. 이 세상에 대한 책임과 권세를 인간과 함께 하기로 선택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로 하나님께 매달려야 한다. 결실을 보기 전까지는 멈춰서는 안 된다. 기도의 응답을 보기까지 하늘보좌를 흔들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지속적으로 기도할 뿐만 아니라 강하고도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한다. 지금도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물으신다. “네게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느냐?”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 질문에 답하고 기도가 응답되기까지 하나님으로 하여금 쉬지 못하도록 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제12장 영적 전쟁에 임하는 방법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우리가 살아야 하는 방식인 거룩한 삶과 연결시켜 놓으셨다. 이미 패배한 마귀는 사람들이 죄를 짓고 이기적으로 살 때만 기승을 부린다. 죄는 마귀에게 문을 개방하는 것이다. 에베소서 4장 27절은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고 말씀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적 전쟁에 임하는 방법은;
첫째, 회개하는 것이다. 내가 회개하면 어둠의 세력은 무너진다.
둘째, 하나님의 주권을 주장하는 것이다. 어둠의 세력을 깨뜨리기 위해 하나님께 순종하며 나아가는 것이다.
셋째, 지역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넷째, 전도하는 것이다.
다섯째, 의로운 마음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여섯째, 죄에 얽매인 포로를 자유케 하는 것이다.
일곱째, 금식하는 것이다.
여덟째, 남에게 나눠주는 것이다.
아홉째, 연합하는 것이다.
열번째,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기사와 표적을 나타내는 것이다.
열한번째, 섬기는 것이다.
열두번째, 레마의 말씀에 근거한 믿음의 행동을 보이는 것이다.
열세번째, 찬양하는 것이다.
열네번째, 입술로 마귀를 대적하는 것이다.
열다섯번째, 언제나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끈기를 가지고 견디어 내면 마귀는 꼼짝 못한다.
영적 전쟁은 삶이다. 그것은 진리를 품으면서 원수를 분별하고 하나님께 헌신하는 매일의 삶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손에 그 처분을 맡기셨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우리가 어둠의 세력을 몰아내지 않는다면 어둠의 세력은 물러가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세상에 있는 악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악은 계속 성장할 것이다. 끝으로 다시 강조한다. 영적 전쟁은 기독교의 어느 한 부분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모든 경험 가운데 있으며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다 포괄한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곧 영적 전쟁의 용사가 된다는 말이다. 영적 전쟁의 용사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지속적인 승리의 삶을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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