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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육/큐티

포기할 수 없는 사명

by 꿈꾸는 나무의자 2018. 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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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들과 작별한 뒤 바다로 나가 배를 타고 곧장 고스로 갔습니다. 이튿날 우리는 로도에 이르렀고 그곳에서 또 바다라로 갔습니다. / 우리는 페니키아로 건너가는 배를 만나 타고 가다가 / 키프로스 섬이 보이자 그 섬을 왼쪽에 두고 시리아로 행선해 두로에 배를 댔습니다. 그곳에서 배의 짐을 풀기로 돼 있었기 때문입니다. / 우리는 두로에서 제자들을 만나 그들과 함께 7일을 지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전했습니다. / 그러나 날이 다 지나자 우리는 두로를 떠나 항해 길에 올랐습니다. 모든 제자들과 그 아내들과 자녀들이 도시 밖까지 따라 나와 우리를 전송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그곳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 서로 작별 인사를 나눈 뒤 우리는 배에 올랐고 그들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 우리는 두로에서부터 여행을 계속하다 돌레마이에 도착해 형제들에게 인사하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지냈습니다. / 이튿날 길을 떠난 우리는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사람 가운데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 그에게는 결혼하지 않은 네 명의 딸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예언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 그곳에서 여러 날을 지내는 가운데 아가보라는 예언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왔습니다. / 그가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허리띠를 집어 자기 손발에 매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유대 사람들이 이 허리띠 주인을 이렇게 동여매 이방 사람들에게 넘겨줄 것이라고 성령께서 말씀하십니다." / 우리는 이 말을 듣고 그곳 사람들과 함께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간곡히 권했습니다. / 그러자 바울이 대답했습니다. "왜 여러분은 울면서 내 마음을 아프게 합니까?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해 예루살렘에서 붙잡힐 것은 물론 죽을 각오도 돼 있습니다." / 바울이 설득당하지 않자 우리는 "주의 뜻이 이뤄지길 기원합니다" 하고는 더 말하지 않았습니다. / 이 일 뒤에 우리는 준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 가이사랴의 몇몇 제자들이 동행해 우리를 나손의 집으로 데려다 주어 우리는 그 집에 머무르게 됐습니다. 나손은 키프로스 출신으로 일찍부터 제자가 된 사람이었습니다. (행21:1-16, 우리말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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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차례에 걸친 전도여행이 마무리되고 예루살렘으로의 여정이 시작됩니다. 바울은 형제들의 만류에도 목숨을 각오할 만큼 이 여정이 하나님의 뜻임을 확신합니다.

4,11절 성령의 뜻은 모순되지 않습니다. 바울은 성령의 명령을 따라 예루살렘 행을 결심했습니다(20장 22,23절). 하지만 동일한 성령의 감동을 받은 형제들은 바울의 예루살렘 행을 만류합니다. 모순처럼 보이나, 그들의 말은 오히려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위험을 재차 강조하는 역할을 하며, 바울의 마음을 준비시켜주었을 것입니다. 이후 바울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한”(누가복음 9장 51절) 예수님처럼 흔들림 없이 고난의 길로 향합니다. 때로 많은 이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길일지라도 성령이 나를 인도하신 역사를 간증할 수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어서 걸어가십시오.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전체 선교 여정은 험난했지만, 가는 곳마다 어려운 고비 때마다 바울 일행을 돕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사심 없이 환대하고, 언제든지 머물 자리를 내어주며(4,7,8,16절), 항상 그의 안위를 걱정하며 기도해주는 이들이었습니다. 자주 만날 수 없고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들은 늘 바울의 영적인 자녀였고 동료였습니다. 이런 아름다운 연대가 우리에게도 보입니까? 복음의 일꾼들과 힘든 시절을 보내고 있는 지체들을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요? 

4,8~12절 바울이 방문하는 곳마다 형제들은 예루살렘 행을 만류합니다. 유대에서 온 선지자 아가보도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는 상징적인 행동을 보이며 예루살렘에서 당할 환난을 예고합니다. 유대인들처럼 악의적으로 방해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지도자에 대한 염려와 사랑 때문에 만류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의 뜻과 사명(20장 23,24절)보다 앞설 수는 없습니다. 

13~16절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자신이 겪을 환난에 대해 반복적으로 권고와 계시를 받지만 예루살렘 행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 여정이 하나님의 뜻임을 확신했기에, 결박은 물론이고 죽음까지도 각오한 것입니다. 나에게 사명의 다짐을 무디게 하고, 사명의 걸음을 더디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도처럼, 사력을 다할 정도로 사모하며 가슴에 사무치는 사명이 내게도 있습니까? 

기도
공동체-주의 뜻이고 제 사명이라면 어떠한 고난과 희생도 감수하겠습니다. 
열방-2004년 이후 스페인에서 700명의 급진주의자들이 체포되고 여러 테러 사건들이 발생했다. 정부와 사회, 교회가 무슬림 이주민들을 잘 통합하고 급진주의를 차단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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